시드니의 한인사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한인들이 교회에 모여서 이국땅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달래고, 서로 정을 나눈다. 또 때로는 신에게 의지하여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렇게 교회에 모여서 신앙적 공감을 나누고 때로는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것은 무척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그렇게 교회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뿌듯함마저 느끼게 하는 소중한 커뮤니티다.
그러나 지나침은 모자람만 같지 못하다는 옛 성현의 말씀이 있다. 말하자면 정도를 지나친 공동체 의식과 과도한 연대감이 그 공동체외의 사람들에게 소외를 느끼게 만드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한다. 특히 기독교 신앙에 부정적인 한인들에게는 대다수가 교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진 모습이 그리 달가울 리가 없다.
거기에 더하여 신앙을 핑계 삼아 교회에 들어간 후 교인들을 대상으로 비즈니스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물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비즈니스라면 그조차 그리 문제가 아닐 테지만 누군가의 피해를 피할 수 없는 비즈니스의 경우엔 좀 심각해진다.
예를 들어 다단계 사업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다단계는 무한히 증식될 수가 없다. 한계에 달하여 더 이상의 증식이 어렵게 되면 마지막 단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고스란히 경제적 피해를 떠안고 만다. 교회공동체를 발판삼아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때로는 정치적 편향성을 공유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일도 일어나곤 한다. 합리적 근거도 없이 특정한 정파의 이익에 종사하는 패거리를 형성하는 일이 있다. 마치 한국사회에서 기독교가 특정정파의 편에 서서 정치적 행위를 하는 일들을 연상하게 만드는 일이다. 좁은 한인사회에서 교회공동체의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특히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날 한국교회가 신앙의 대상인 예수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으로 이익집단이 돼가는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의 삶은 자신을 희생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끝이 난다. 그는 기득권자들의 탐욕을 나무랐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 그리고 어린이를 존중히 여겼다. 그의 모든 행보는 약자와의 연대로 집약된다. 그는 또 기존의 사회질서와 율법에 사로잡힌 자들의 형식주의를 질타한 바가 있다. 말하자면 당시의 기득권층에게 그는 반체제 인사였다.
모두에게 서로 사랑함은 물론 욕심을 버리고 나눌 것을 설파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적 질서와는 상극인 삶을 살다 갔다. 그 것도 탐욕에 물든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끝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면서 삶을 마쳤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공고히 형성된 자본주의적 질서를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자신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 남긴 교훈들을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돌아보면 예수는 단지 교회를 광고하기 위한 모델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교회들이 하는 일마다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부를 축적하고, 그 것을 대물림하며, 나누고 베풀기 보다는 움켜쥐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어린이를 귀히 여기기보다는 재산을 많이 가지고 헌금을 많이 할 수 있는 자들에게 매우 달콤한 설교를 늘어놓는다.
정치적으로는 자본가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파에게 무조건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 예수는 저만큼 멀리 쫓겨나고 부자들만이 득실대는 모습을 하고 있다. 교회전단지에 등장하는 예수는 그저 교회의 광고모델에 불과해 보인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바에는 왜 그를 광고모델처럼 동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을 예수께서 본다면 아마도 회칠한 무덤이라 할 것이다. 또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던 때의 모습보다 더욱 강렬하게 분노할 것이다. 약자보다는 강자들에게 붙어서 기득권을 적절히 옹호해주고 그들에게 경제적 보상을 받는 교회에 이미 예수는 너무도 멀리 쫓겨나고 없다.
지금 시드니를 중심으로 호주에 정착한 한인사회가 교회를 통해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서로 의지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것이 지나치게 편향된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지금 회칠한 무덤이라 비판받는 한국의 초대형 교회들을 답습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제 한인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일에만 더욱 몰두할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가 한인들의 사회 속으로 나아가서 역할을 찾고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적어도 약자와의 연대라는 예수의 사상을 부인해선 안 될 것이다.
혹시라도 자신이 예수의 반대편에 서서 그에게 비판받던 기득권층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돌아봐야한다. 기득권자들의 쏟아지는 비난에도 굴하지 않았던 예수를 신앙한다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버둥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편 갈라서 약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좁은 울타리를 만들어서 누군가 힘없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두 돌아볼 일이다.
이국땅에 모인 한인들이라도 교회와 사업과 돈만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과 포용과 약자에 대한 배려를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예수의 뜻이고, 그에게 대적하지 않는 일이다. 한국의 초대형 교회들을 좋다고 본받을 일이 아니라 그들과는 전혀 다른 곳에 진리가 있음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결코 자본가와 기득권층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지금 다시 이 땅에 온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런 타협은 없을 것이다. 시드니에 한인교회들이 서로 협력하고 선을 이루는 모습을 보고 싶다. 부자들이 아닌 예수를 신앙하는 진실한 모습을 보고 싶다. 돈이 아닌 이웃사랑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배제하고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편안한 이웃이었으면 좋겠다. 무리한 바램일까?
부디 한국의 대형교회와는 좀 다른 모습이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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