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족사에 투영된 8.15 해방의 의미 역사,민족,평화

                 

 

아버지에 대한 원망

 

어린 시절 나의 눈에 아버지는 무척이나 나약하고 무능하게 보였다.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어려운 형편에 늘 외지를 방랑하다 1년에 한번 집에 들를까 말까 했을 뿐 아니라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는 활동은 거의 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항상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는 동안 아버지를 원망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처럼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많이 힘들어 보였다. 드러누워 시름시름 앓더니 불과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그 때의 내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다. 아직 아버지를 여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어리고 철이 없었다. 물론 그리 슬퍼하지도 않았으며 종종 가난을 물려주신 아버지를 원망하며 지냈다.

 

딱히 정해진 수입원이 없었던 터라 의무교육인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사무실의 급사로 취직을 해야만 했다. 친구들이 교복 입은 모습을 바라보며 느꼈던 그 좌절감은 상당기간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아버지는 원망이 아닌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나와는 14년 터울인 누나에게 아버지의 과거에 대하여 들은 후로는 항상 짠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징용에 끌려갔다 8.15해방과 함께 돌아오셨다는 것이다. 또 돌아와서는 자신이 마치 조국에 죄라도 지은 양 부끄러워 고향의 일가친척을 모두 등지고 떠나왔다고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아버지가 당신의 과거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일은 본 일이 없다. 가슴에 상처와 한으로 남았을 과거사를 자식인 나에게도 숨기고 싶었던 것이리라.

 

단발령과 창씨개명 거부 그리고 점점 기우는 가세

 

그런 아버지를 아들이 없던 외할아버지께서 데릴사위로 삼으셨다. 지역에서는 나름 존경받는 유학자(儒學者)이던 외할아버지는 꽤나 넉넉한 농토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농사일을 하던 머슴이 10여명이나 되었다니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던 것 같다. 물론 아버지를 사위로 맞이할 즈음엔 이미 가세는 기울고 허명만 남은 상태였다.

 

외할아버지는 성격과 기질이 상당히 꼬장꼬장한 분이었던 모양이다. 단발령도 거부하고 창씨개명도 거부했으니 일제가 손봐야 할 주요대상이었던 것이다. 일제의 수탈은 이런 집에 더욱 가혹했을 법하다. 추수해서 곡식을 좀 숨겨놓기라도 하면 귀신같이 알고 찾아내서 빼앗아가곤 했다는 것이다. 머슴들의 새경을 주고 가족들이 먹을 것도 변변히 남기기 어려웠다고 한다.

 

당시 일하던 머슴들 중에는 상머슴이 한명 있었다. 묘하게도 그 상머슴의 집안은 날로 풍족해지기만 했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 집은 해방이 되고나자 이미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형편이 되어 있었다. 뚜렷한 근거는 없으나 우리 집 비밀곡간을 밀고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 뭔가 옳지 않은 일을 한 대가로 부를 축적했다며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말하자면 합리적이지 못한 의심인 것이다.

 

그렇게 몰락해가는 집안의 데릴사위로 들어와서 아버지는 1947년 아들을 보게 되었다. 또 두해 지나서는 딸을 낳았다. 바로 나에게는 형이고 누나이다. 형은 1947년생이다. 그렇게 태어난 형은 열 살을 겨우 넘긴 나이에 남의 집 생활을 해야 했다. 형이 일하던 방앗간 집이 바로 외할아버지 집에서 상머슴 생활을 하던 그 분의 집이었다.

 

나는 그런 우리의 가족사를 모르고 자랐다. 그 방앗간 집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애기씨'이라 칭하고, 어머니는 그 분에게 항상 '아짐'이라 칭했지만 그 호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성장한 후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설명해주셨다. 바로 머슴살이 하던 집의 부인이나 집안 살림 해주는 분에게 '아짐'이라는 호칭을 하고, 주인댁의 딸에게 '애기씨'라 칭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집안의 누구도 그 집을 질시하거나 경원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 집안과는 항상 친근한 관계로 지내왔으며 도움을 받은 일도 적지 않았다. 타인들의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우리가족은 그 분들의 근면하고 성실한 생활에 근거하여 그 분들의 부가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한과 가세가 이울어가는 그늘에는 어김없이 일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버지가 징용에 다녀온 후로 가슴에 안고 살아가던 회한과 분노가 바로 일제로 인한 것 이었고, 외할아버지가 꽤나 넉넉한 가산을 모두 잃고 가난해진 것도 일제에 대한 비협조가 원인이었던 것이다.

 

전도된 역사와 가치관

 

우리집안에는 일제와의 항일전쟁에 나선 독립투사도 없고, 독립군을 지원하거나 국권 회복을 위해 특별히 노력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깊은 좌절과 가난을 대물림해왔다.

 

하물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가족이 희생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어떨까? 가산을 모두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내놓은 분들은 또 어떨까? 후손들은 가난을 대물림하며 친일파의 후손들이 대대로 기득권을 누리고 살아가는 모습을 가슴 아프게 바라봐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또 우리가 국권을 상실했던 기간, 바로 그런 역사의 희생양이 되어 삶이 고통으로 점철된 분들이 있었다. 바로 정신대 할머니들이다. 여전히 일본정부는 그 분들의 고통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며 발뺌을 하고 있다. 그 분들의 고통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일제의 만행과 우리의 나약했던 국력의 탓인 것이다. 그 분들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희생을 당하고도 모든 고통을 스스로 지고 살아가도록 만든 국가와 우리도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일제는 그 잔혹했던 식민통치의 역사를 부인하고 하나씩 지워나가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종종 독도를 자신들의 땅이라 주장하는 자들이 등장한다. 역사교과서를 왜곡하는 일은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해방 후에도 사회 각 분야에서 기득권을 유지하며 대물림하고 있다. 심지어 친일의 대가로 얻은 재산을 자랑스럽게 여길 뿐 아니라 조상들의 친일을 미화하거나 합리화하려고 당당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형편이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가 흘러가서는 안 된다. 또 다시 대한민국에 누란의 위기가 다가올 때를 상상해보자. 누가라도 나서서 자신을 희생하며 국권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전도된 역사와 가치관을 학습하지 않았는가? 저항하면 대대로 가난과 고통을 물려받으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는 것과 순응하고 협력하면 수많은 기득권과 부를 누리고 세습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우리의 과제

 

그래서 역사는 전도된 기록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 독립투사는 독립투사로 기록되어야 한다. 친일파는 친일파로 기록되어야 한다. 독립운동은 명예로운 역사적 기록이어야 한다. 친일은 부끄러운 역사적 기록이어야 한다. 일제의 폭압에 희생당한 분들은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따스하게 껴안고 보살펴야 당연한 것이다. 우리의 내부에서조차 역사가 전도되어 흘러가고 있는데 일제의 진정한 반성과 사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친일파의 후손들을 단죄하자는 것이 아니다. 무슨 연좌제를 부활하자는 것도 아니다. 또 그렇게 할 방법도 없다. 독립지사의 후손들에게 엄청난 금액의 경제적 보상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 또한 그리 가능하지도 않으며 합당하지도 않다. 조상은 조상이고, 후손은 후손일 뿐이다. 시급한 것은 역사를 바로 기록하는 일이다.

 

다시 우리가 누란의 위기를 맞았을 때 누구라도 나서서 우리의 국권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나서 싸우는 것이 명예롭고 옳은 일임을 역사에 기록하는 일이다. 또 민족을 배신하고 반민족적 행위를 하는 것이 부끄럽고 해서는 안 될 일임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그래야 힘 있는 자에게는 굴종하고 불의와 타협해서 이득을 취하는 것보다는 정의롭고 옳은 상식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그 것을 위해서 우리는 전도된 역사를 정립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전도된 역사라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바로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우리의 역사적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고통 속에서 평생을 신음하신 분들을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따스하게 보살펴 드려야 한다.

 

이제 64년째 되는 광복절을 맞아 우리가 서둘러야 할 일이다. 이런 일을 해내지 못하면 진정한 광복은 아직도 멀었다. 그래서 그리 자랑스럽지 못한 내 가족사를 이렇게 노출해가며 이번 광복절을 맞이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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