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 정비사업에 집착하는 정권 경제

한동안 잘 나가던 중동의 두바이가 지금 휘청거리고 있다. 세계에서 최고로 높은 버즈두바이가 건설되고 많은 건설노동자들이 몰려들며 흥청거리던 그 곳이 이제는 세계경제에 충격파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국영기업인 '두바이월드'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과연 두바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유가가 천정부지로 치솟던 시절 두바이에는 많은 돈이 몰렸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엄청난 규모의 건설공사가 시작되고 건설노동자들을 흡수하기 시작하였다. 버즈두바이는 바로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상징물일 것이다.

 

하지만 리먼부라더스 파산과 미국의 파생금융상품 대란이 이어지며 세계경제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결국 유가는 급속히 하락하고 두바이도 점차 일자리가 줄어들며 건설노동자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점차 유입되던 자본들도 조금씩 이탈이 시작되고 두바이는 썰렁한 공사현장들이 곳곳에 방치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이 바로 토목과 건설로 형성된 버블의 붕괴현상이다. 문제는 이러한 전철을 대한민국이 밟으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정비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경제가 위기국면을 벗어나고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토목사업을 벌이는 것으로 경제를 살릴 수는 없다. 더 많은 버블을 만들고 위기의 원인을 키울 뿐 장기적으로 이로울 것이 없는 일에 혈세를 쏟아 붓는 일이다.

 

정권이 내세우는 4대강 정비사업의 필요성도 전혀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다.

 

첫째, 4대강을 정비하면 수질이 개선된다는 주장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다. 수질은 오히려 크게 악화될 것이다. 수중보를 설치하고 바닥을 준설하면 자연적 흐름을 잃은 물은 고여서 썩을 것이 뻔하다. 그 물을 상수원으로 쓰려면 또 다시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입하여 수질개선 사업을 해야 할 것이다.

 

둘째, 홍수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 또한 전혀 근거가 없다. 한국이 강수량의 계절적 편차가 심하여 홍수를 자주 겪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4대강의 주류에서 홍수가 나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홍수가 지류나 소규모 하천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왜 4대강을 정비하여 홍수를 대비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지류나 소규모 하천을 정비하는 것이 예산도 적게 들고 효과도 높이는 일이 될 것이다.

 

셋째, 인공적 구조물이 설치되면 될수록 끔찍한 흉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또 그렇게 만들어진 인공구조물들은 자연생태계를 파괴하여 복원할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 것이다. 과거 현대건설이 맡아서 했던 한강의 구조물이 생태계를 살려서 한강에 물고기가 살게 되었다는 주장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한강의 생태계 부분복원은 수질 오염원을 찾아서 오폐수 처리를 효과적으로 했기 때문이지 콘크리트 구조물이 설치되고 바닥이 준설돼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넷째, 4대강을 정비하면 관광수입이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기까지 하다. 아무도 자연생태계가 살아있지 않은 인공구조물을 구경하러 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인공구조물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벗어나고 싶어 하는 대상일 뿐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하천들이 관광수입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자연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결코 인공구조물과 준설 때문이 아니다. 시드니의 곳곳을 강처럼 흘러드는 좁은 바다물길도 자연과의 조화가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다.

 

4대강 정비 사업은 이명박 대통령 자신이 대선 때 내걸었던 대운하를 위한 사전작업이 아닌 가 의심하는 국민들이 많다. 엄청난 예산을 투입하는 만큼 국가재정의 악화를 피할 수 없다는 전문가들의 걱정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국민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일이라면 정권이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옳다. 그 것이 민주주의 원리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토목사업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효과가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일 것이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건설업 경기는 좀 나아질 수 있다. 또 일시적으로 건설현장의 일용직 노동자의 고용사정은 향상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임기응변적 처방에 엄청난 국고를 쏟아 붓고 재정적자를 감수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정권을 잡은 세력은 경기가 좋은 것처럼 국민을 속이기 위하여 토목과 건설에 재정을 투입하고 싶어 한다. 특히 한국의 경우 늘 그렇게 국민을 속여서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확대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후에 다가올 후유증과 후폭풍은 고스란히 서민대중에게 전가되어 왔던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마치 마약에 중독된 자에게 마약을 늘려서 투입하는 것처럼 일시적으로 고통을 잊게 만들지만 후에 중독의 정도가 더욱 강해지면 점점 치료만 어려워질 뿐이다.

 

서두에 거론한 두바이가 좋은 예이다. 건설수요가 과도하게 부풀려지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착각에 빠지지만 곧 다가올 엄청난 고통은 누가 나서서 감당할 것인가? 이제 한국의 경제규모도 세계에서 12위와 13위를 오가는 수준이 되었다. 이제는 토목과 건설이라는 마약을 끊고 견실한 장기적 토대를 다져야할 때가 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저소득층의 시장참여를 가능하게 만드는 정책이다. 거주비와 집값을 적절한 수준에서 통제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사교육비를 지속적으로 줄여나가도록 교육제도를 보완하는 일도 절실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계상황에 노출된 극빈층을 구제할 수 있도록 복지재정의 확충이 절실한 과제이다.

 

복지재정은 토목공사비와 달리 곧 저소득층의 소비활동이 사용될 것이고, 그 것은 또 기업에게 시장기회를 확대해줄 것이다. 이는 또 고용시장의 상황을 개선하고 경제를 선순환 하도록 유인하게 된다.

 

이제는 버즈두바이를 볼 것이 아니고, 4대강 정비사업과 같은 토목공사를 벌일 것이 아니라 진정한 경기선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 경제는 토목과 건설이 살린다는 구시대적 사고를 하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점점 어두워질 뿐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면 설혹 일시적으로 경기가 살아나더라도 미래는 어두울 뿐이다.

 

거대한 규모의 국가재정을 토목공사에 투입할 것이 아니라 서민복지에 직접 지출하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일이다. 부디 토목공사가 경제를 살릴 것이라는 사고에서 그만 깨어나 주기를 바란다. 이 일은 정권의 명운이 달린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린 문제인 것이다.

 

 

 


백색테러, 친일인명사전, 그리고 박정희 역사,민족,평화

우리는 종종 심하게 시대착오적인 일에 대하여 '자유당 때'라는 말을 쓰곤 한다. 수많은 정당들이 명멸하였음에도 아직 여전히 자유당 시절의 사고나 행동을 한다면 꽤나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집권당의 역사로만 따져도 적지 않은 정당들이 우리의 현대사를 장식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선 자유당 시절을 넘어 더 오래된 낡은 장면들이 재현되고 있다. 바로 일부 보수를 자처하는 극우단체가 그 주인공들이다. 시민단체에서 집회를 열면 느닷없이 나타나 폭력을 휘두르고 난동을 부려서 집회를 방해한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묘지훼손을 시도하기도 하였고, 친일인명사전의 발간기념행사에도 어김없이 나타나서 훼방을 놓는다.


이 들의 행태는 마치 해방공간에서 백색테러를 일으키던 일단의 깡패들을 연상하게 만든다. 해방을 맞았으니 자연스럽게 친일파를 처결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했을 역사적 과업을 이들은 철저히 방해하였다. 아니 일단의 친일파와 정치가들의 수작에 이 들이 놀아난 결과였을 것이다.


친일파의 척결이 급한 일이 아니라 일단 좌파들을 척결하는 것이 애국이라며 대중들의 분노대상을 교묘히 바꿔놓고 바로 백주대낮에 사람을 때려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특히 친일문제를 정리하기 위해서 세워진 반민특위를 때려 부수는 일에도 혁혁한 전공(?)을 세운 바가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이루어지기도 전부터 이들이 설치기 시작했으니 자유당 시대를 훨씬 앞지르는 일이다. 그 만큼 시대착오적인 일이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나타나서 폭행을 저지르고 집회방해를 하지만 경찰에 의하여 제지되는 일이 별로 없다. 혹시 경찰이 이들을 제지하더라도 이미 집회방해의 목적을 달성한 후에나 뒷북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시대를 극심하게 거슬러 올라간다. 좌파척결은 물론이고 빨갱이 때려잡기까지 등장한다. 과연 좌파는 빨갱이고 그 들은 척결할 대상일까? 이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대한민국은 좌파빨갱이가 득실대는 위험한 곳일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이후 좌파가 발붙일 공간이 없었다. 정부수립 전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좌파로 낙인찍힌 사람은 설자리를 잃었다. 특히 길고도 혹독했던 군사정권 하에서 좌파라는 낙인은 무서운 천형과도 같았다. 바로 그러한 낙인은 정적을 제압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데 항상 동원되는 수단이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이 주로 사용하던 단골메뉴다.


빨갱이란 아마도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Partisan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 오늘날에 그 들이 남한 땅에 남아 있을 방법도 가능성도 전혀 없다. 물론 정책적 선호에서 좌파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일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또 좌파적 사고는 죄악이 아니다. 실재로 대한민국의 헌법은 사상의 자유를 확실히 명시하고 있으니 좌파가 죄인취급을 받는다면 그 것은 헌법을 무시하는 일이 되고 만다. 좌우를 가지고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70년대 냉전시대를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증거이자 시대착오적 행태일 뿐 아니라 그 시대에서 발전하지 못하고 지능이 정지된 것이다.


어쨌건 그들의 집요한 반대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친일인명사전의 탄생을 보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김구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항일독립투사들에게 조금이나마 후손으로서 면목이 설 수 있는 일이다. 역사에 그렇게 사실을 기록하고 정리해 두는 것은 후손들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 중 가장 주목을 끄는 인물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그는 스스로 일본왕의 군인이 되기 위해서 혈서까지 쓰며 충성을 맹세하였다. 물론 만주국 장교로 충직한 황군(?)이 된 것은 그 인생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또 그는 후에 남로당에 가입하고 활동한 일로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묘히 살아남아 대한민국의 군 장성이 되었으며, 후에 쿠데타로 집권하여 영구집권을 꿈꾸기도 하였다. 악명 높은 유신헌법과 좌파에 대한 적개심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변신의 연속이었다.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일각에서 그가 친일파가 아니라는 주장하는 모양이다. 그가 단지 보여주기 위해 거짓으로 혈서를 쓰고 충성을 맹세했다고 하더라도 그 것은 친일행위가 아니라고 해석할 길이 없다. 다만 지금 한국의 보수를 자임하는 사람들은 박정희를 향수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친일파임을 부인하고 싶을 것이다. 마치 자신들의 핵심부가 친일임을 들킨 것이 치부를 드러낸 것처럼 부끄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억지를 부릴 것이 아니라 조용히 사람들이 잊어주기를 기다리는 편이 현명한 일이다.



그런 식으로 주장한다면 사실 이완용도 송병준도 모두 변명의 여지가 없지 않을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었는데 매국노는 없다는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일제초기에 항일운동을 하다가 도모지 해방의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말기에 잠시 변절했던 사람들은 차라리 나은 편이다. 뉘라서 항일이 친일보다 자신의 앞날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겠는가? 친일은 친일로, 항일은 항일로 모두 역사에 기록해 두는 것이 옳은 일이다.




물론 그 일로 인하여 후손들이 연좌제적 형벌에 직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특히 박정희의 딸이라는 이유로 가장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인 박근혜 의원이 불이익을 받는다면 부당한 일이다. 그녀는 그의 딸로 태어났을 뿐 그의 죄를 대신 벌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엄연히 다른 자연인이고 별도의 인격체임에 틀림이 없다.




문제는 그녀가 아버지의 잘못에 대한 인식은 물론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여전히 아버지의 전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면 문제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 특별히 한국의 정치사에 자신의 족적이 남을만한 일이 없음에도 유력한 대권주자의 반열에 오른 것이 혹시 아버지의 유산이라면 이는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본래 상속은 자산과 부채를 동시에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부채를 부정하려면 아버지의 자산 또한 내려놓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사실 문제는 그녀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박정희가 독재는 했지만 민족을 굶주림에서 구원한 구세주인양 인식하고 환호작약하는 대중들의 저열한 인식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과연 누군가의 독재가 일말의 경제성장과 교환하여 용서할 수 있는 가벼운 일이라면 전 세계의 민주국가들이 왜 그토록 독재자에 대하여 호된 평가를 하겠는가? 지금 시대착오적인 백색테러를 자행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환호하는 정치인이라면 뭔가 출발부터 되돌아 봐야 할 일이다.




누군가 물려받은 친일대가의 재산을 스스로 내어 놓으며 자신의 아버지를 친일파라고 인정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누군들 자신의 아버지를 친일파로 인정하고 물려받은 재산을 내놓기가 쉬운 일이겠는가? 쉽지는 않지만 가끔은 이런 사람도 좀 볼 수 있었으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것이다. 자산을 물려받았으면 부채도 기꺼이 함께 부담으로 져야한다. 부채를 부인하려면 자산도 스스로 내려놓는 것이 현대적 법정신과도 어울리는 일이다.



한국의 정치상황, 한국교회, 그리고 비판 인권과 평등,종교

지인 가운데 한 사람은 내게 '이제 한국정치에 관심두지 말고 이민생활이나 잘 적응하라'고 권유한다. 또 어떤 분들은 '비판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해진다'며 가급적 비판을 삼가라고 권한다.


한편으로는 수긍이 가는 권유가 아닐 수 없다. 사실 형편이 그리 넉넉지 못하면서 먼 고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가진들 그리 개인적으로 유익할 리가 없다. 비판을 하는 것보다 현실이 행복하다고 스스로 자기최면을 거는 쪽이 훨씬 행복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판은 포기할 수 없는 애정의 다른 이름이다. 대상에 대한 애정이 결여된 경우라면 비판할 동기가 사라지고 만다. 무관심한 대상에 대하여 누가 비판을 하겠는가?


물론 비판은 확고히 공익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며, 확고한 사실에 기반을 둬야 한다. 공익이 아닌 사리를 목적으로 한다면 그 것은 음흉한 모략이 되고, 또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았다면 그 자체로 비방이나 비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정치에 대한 비판,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이 모두 나름 내 방식의 애정을 표현하는 것임을 이해해주면 좋겠다. 내가 45년 이상을 살아왔던 대한민국에 대하여 어떻게 순식간에 애정을 접을 수 있겠는가? 성인이 되기도 전부터 몸담았던 교회에 대하여 무슨 수로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다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자. 대한민국의 헌법은 엄중하게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하고 있다.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뭔가 민주국가로서는 영 체통이 서지 않는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 중에 한 대목이 기억에 있다. "전직 대통령이 존경받는 풍토를 만들겠
다."는 대목이다. 그동안 끝없이 이어지던 전직 대통령들의 퇴임 후 불행한 모습들이 이제는 사라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었다. 그런데 취임하자마자 곧장 국가기록물 유출 건으로 흠집을 내더니 마침내 가족들과 측근기업인의 돈거래를 빌미로 친인척은 물론 중병에 신음하던 측근들조차 모조리 사법적 가해를 당했다. 결국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


정권을 잡고 곧장 지난 정권이 했던 모든 일을 무위로 돌리는데 그야말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남북관계나 미국산 쇠고기 문제가 그렇고, 한반도 대운하와 4대강 토목공사가 그렇다. 권력기관의 독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세종시의 백지화 움직임도 그런 맥락의 일환이다.


자신들은 지난 10년간 마음껏 비난의 자유조차 누렸지만 이제는 비판적인 언론과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 뉴스에서 퇴출된 신경민 앵커, 시사토론의 정관용씨, 백분토론의 손석희씨, MBC PD수첩 관련자들, 가수 윤도현, 방송인 김제동등 모두가 시청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정권에 밉보여서 쫓겨났다. 지난 정권에서 유인촌, 이덕화, 백일섭, 김흥국 등 모두가 거리낌 없이 활동하던 것에 비교해볼 문제이다.


미디어 관련법의 처리과정에서는 민주주의의 사망을 보는듯한 느낌마저 든다. 야당의원들의 의결권을 강압으로 막았고, 자신들끼리는 서로 대리투표를 하는 등 차마 민주국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다. 국민의 다수가 반대하는 일을 이렇게 절차법을 어기며 처리하는 것이 민주국가의 국회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또 매우 비겁하고 우스운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의결과정에서의 문제는 많았지만 결과를 무효로 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절차적 결격이 있는 법률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앞으로 국회법은 지킬 필요가 있을까? 600년 전 경국대전을 근거로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법률을 무효로 했던 판결처럼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판결이 또 하나 탄생하였다.


헌재의 판결에 대한 패러디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당선은 되었지만 대통령은 아니다.'라거나 'BBK를 설립은 하였으나 내 것은 아니다.'하는 식이다. 또 '강간과 폭행은 했지만 범죄는 술이 저질렀다.'거나 '선거법을 위반했지만 당선은 유효하다.'는 등 온통 헌재와 사법부를 불신하는 조롱이 담겨 있다. 심지어 '헌재가 판결은 했으나 유효한 것은 아니다.'고 신랄하게 헌재의 결정자체를 빗댄 패러디도 있었다.


행정부의 권력에 대한 불신이 있다면 국회가, 국회도 믿을 수 없다면 최소한 사법부는 균형자적 역할을 해줘야 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국민의 절망감은 점점 더 깊어가는 것이다.


이제 국민들도 눈치를 살피며 생각을 감추기에 바쁘다. 10월 28일에 있었던 재보선의 결과에서 나는 국민들의 마음을 보았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50%를 넘어 청와대가 자축하는 분위기에서 치러진 재보선의 결과치고는 여당의 대참패가 아닐 수 없다. 그 간의 여론조사가 조작되었거나 아니면 국민들이 여론조사에서 자신의 마음을 숨겨왔던 것이다.


언론은 연일 집권세력의 비위를 맞추는데 여념이 없다. 언론이 권력과 유착을 형성하는 것은 그 사회에 비판기능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비판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할 뿐 아니라 패망을 향해 질주하는 폭주기관차에 다를 바가 없다.


비판받지 않아서 부패한 전형적인 예가 종교에 있다. 가톨릭은 절대 권력을 향유하며 부패했었다.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생겨난 종교였으나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신도들과 엄격히 구분된 성직자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바빴다. 자신들이 스스로 신이 되어 면죄부를 팔아먹는 등 타락이 극에 달하며 종교개혁 운동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물론 종교개혁을 주도한 자들의 동기를 의심하는 설도 있지만 그렇게 가톨릭의 부패에 대한 반향으로 신교가 탄생하였다. 성직자와 신도를 계급으로 분류하여 엄격히 속박하고 비판을 막아온 결과물이 극악한 부패로 나타났다. 또 자신들의 부패상을 감추기 위해서 마녀사냥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탄생한 신교는 또 어떤가? 특히 한국교회 다수의 목회자들은 부패에 침묵하였으며, 독재 권력에 영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빛과 소금의 역할은 외면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대하는데 몰두하였다. 거대한 교회건물이 그 자체로 기득권이 되고 신도들은 비판할 자유를 잃었다. 심지어 목회자가 무고한 사람들을 저주해도 "아멘"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성서에는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이런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은 사랑의 위대함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 말씀이 비판하는 입을 막는데 동원되고 있다. 교회의 잘못, 목회자의 잘못, 심지어 교회 내 다른 신도들의 잘못을 덮고 쉬쉬하자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비판이 횡행하면 교회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임을 이해는 하지만 비판을 막기 위해서 동원할 말씀은 아닌 것이다.


결국 한국의 초대형 교회들이 그렇게 비판하는 입을 막아놓고 자식들에게 거대한 교회건물과 부동산과 기득권을 세습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출석 신도수와 헌금액수를 계산하여 교회를 사고파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여신도와 간통하다 들통이 나자 도망가다 떨어져 죽는 일까지 생겼다. 또 기독교인들이 똘똘 뭉쳐서 정치권력까지 장악하려는 모습도 비판해야 될 일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려거든 비판에 직면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는 당시의 로마통치와 식민지 유대민족의 통치자들에 통렬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유대교의 제사장들과 율법을 숭상하는 바리새인들을 참소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일갈하던 모습은 여인의 간통을 비호한 것이 아니라 다중의 죄와 무자비하고 부당한 처벌을 비판하는 장면이다. 종교개혁도 잘못에 대한 비판에서 가능한 일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모습이야말로 절실히도 비판이 가해져야할 대상이다. 이민생활이 고달프지만 내가 나서 자란 조국을 사랑하지 않고 무관심할 수가 없고 뿐 더러 그리 옳은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갈수록 빛과 소금의 역할을 포기하고 부패를 재촉하는 균주처럼 변하는 것을 외면하고 사는 것도 그리 좋은 태도는 아니다.


사익을 추구하기에는 비판이 장애가 될 것임을 잘 안다. 그러나, 애정이 있다면 썩어서 뭉그러지기
전에 비판하는 것이 옳다. 허물어지는 민주주의를 그저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점점 부패하여 소돔과 고모라처럼 변모하는 교회를 보고 기도만 하고 앉아 있어도 변화는 없다.


사랑한다면 비판하자. 그러나 인신공격이나 허위의 사실에 근거하여 비방이나 비난을 하지는 말자. 철저히 사실에 기반을 둔 비판, 철저히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비판, 사익을 추구하지 않는 애정 어린 비판이 우리사회를 좀 더 사람 사는 세상에 가깝게 하는 것이 아닐까? 비판은 돌을 던져서 상대를 죽이는 행위가 아니고 애정을 담아 더 나은 지향점을 모색하는 일일 뿐이다.


시드니에서 이민생활 5개월 사회,문화,교육

어느덧 한국을 떠나 이 곳에 온 지 5개월이 되었습니다. 악명 높았던 독재자 박정희가 부하의 손에 최후를 맞은 역사적인 날이기도 하군요. 곳곳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을 보면서 이 곳에 온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이 꽃이 바로 Jacaranda이며, 원산지는 남미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시드니에는 보라색 Jacaranda가 만개하였습니다. 이 곳의 본격적인 봄을 알리는 전령사쯤 되는 꽃이라고 하겠습니다. 곳곳에 보라색이 찬란하게 물든 광경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봄을 알리는 벚꽃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꽃이 호주의 12학년 학생들에게는 매우 반갑지 않은 꽃이라도 합니다. 바로 이 꽃이 만발하는 시기에 그 들은 대학입학을 위한 HSC(Higher School Certificate)을 보아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모두가 봄의 정취를 만끽하는 때에 그들은 중요한 시험을 거쳐야 하니 그리 반갑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곳에도 역시 학생들에게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아이들을 공부와 시험의 지옥에서 해방시키려고 했지만 여기서도 역시 완전한 해방을 선사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좀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한국에서의 편리한 생활을 뒤로 하고, 많은 지인들과의 따스한 교류도 접어둔 채 이곳에 온 이유가 희석되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곳에 와서 문득문득 약한 향수에 젖어 막연히 한국을 그리워하는 일조차 이미 감내하기로 했는데, 이 곳도 역시 입시라는 것이 우리아이들을 괴롭힐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그리 달갑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역시 한국을 떠난 목적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이내 자위하게 됩니다. 우선 대학입시라고 하더라도 한국에서의 그 것과는 직접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대학을 한 줄로 완벽하게 서열화시켜 놓고 소위 말하는 인류대학을 가기 위해서 목을 메는 현상이 이 곳에는 없습니다. 이 곳도 역시 평판이 좋은 대학이 있고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대학이 있지만 뚜렷한 서열을 매기기는 좀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 또 평판이 좋은 대학을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 것이 곧 그 학생의 밝은 미래를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좀 평판이 낮은 대학을 나온다고 사회에 진출할 때 특별히 불리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또 경쟁의 강도도 한국의 그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외고나 과학고 등에 진학하는 것이 유리하고, 그런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중학생들이 엄청난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사교육비를 엄청나게 지출하며 하루 종일 공부하는 경우도 있으니 확실히 이곳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이 곳에서도 한국이나 중국 그리고 인도출신학생들의 경우 Primary School부터 Selective에 진학하려고 사교육을 시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학생들이 평판 좋은 대학에 많이 진학하는 것도 역시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 것이 그들의 인생전체를 결정짓는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처럼 일류대학을 나오면 대기업에 들어가서 시작부터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10학년을 마치고 TAFE에 가서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훨씬 높은 보수를 받고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학력이 높은 사무직과 현장에서 노동하는 기술직이 서로 계급적 차이를 인식하는 것도 아닙니다. 각자 다른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나에게는 훨씬 편안한 한국생활을 접고 아이들을 무한경쟁의 늪에서 탈출시킨 것을 옳은 결정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5개월에 불과한 이 곳 생활에 우리 부부도 아이들도 그리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당히 불편하고 마음에 맞지 않는 일도 많습니다. 하지만 다소간 각오를 했던 일이기에 당황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에서 작은 중소기업이지만 임원으로 편하게 생활하던 것에 비하면 지금 내 생활은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러 가는 아내를 기차역에 내려주고, 아이들을 학교까지 태워다 주고 나서 TAFE에 갑니다. 3시쯤 끝나면 다시 아이들과 아내를 태워서 집에 옵니다. 잠시 한 숨을 돌리고는 5시에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뭐 그리 꺼릴 것이 없으니 공개하자면 큰 회사의 사무실을 청소하는 일입니다.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열심히 하고 시급으로 12불을 받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수입이라곤 집세의 절반도 안 되는 푼돈에 불과합니다.

 

Center Link에서 2주마다 아이들 키우라고 주는 돈까지 합해서 겨우 집세를 낼 수 있을까 말까 합니다. 나머지 생활비와 공과금 등은 모두 한국에서 가져온 돈을 야금야금 헐어 쓰고 있습니다. 물론 TAFE에 다니지 않고 적극적으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생활비는 충당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곳에 살려면 적어도 의사소통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수준의 영어는 해야 하고, 또 장차 안정된 일을 얻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하기에 은행잔고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 온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영어 한마디도 못하고 한국인하고만 아울려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나름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리 따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도 이 곳에서 학교생활을 하며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이제 1학년인 작은 애는 별로 언어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그냥 어울려서 잘 노는 편이죠. 그런데 5학년인 딸아이는 그렇지 못합니다. 한국의 강도 높은 경쟁과 시험에서 해방된 대가를 나름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온 식구가 적응을 위한 몸살을 앓고 있어서 지금은 그리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나마 지금은 훨씬 나아진 셈입니다. 처음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암담했습니다. 마치 이 곳이 추운 겨울이어서 날씨부터 고통스럽기만 했습니다. 기거할 집을 구하기도 만만치 않게 어려웠고, 언어장벽에 대한 공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고통은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 한국을 떠나오던 때에 고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장 기간이었습니다. 한국의 정치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휴머니스트를 가슴에 묻어야 하는 고통이 컸습니다. 정신이 없고 힘든 시간 중에도 문득문득 그분의 서거가 가슴속에 분노를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누가 이렇게까지 만들었는가를 생각하며 분노하고 도 분노했습니다. 시드니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분향을 하고 49재를 한인들과 함께 준비하고 치르면서 분노를 다스렸습니다.

 

가슴속의 분노가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이번에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 한국의 민주주의, 지역주의 정치에 대한 문제의식, 빈부격차의 해소 등을 추구하던 두 분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것이 지금도 분하고 화가 납니다. 화를 다스리는데 여전히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사에 긍정적 의미와 커다란 족적을 남기신 두 분을 한꺼번에 잃은 분노가 하필이면 이민생활 시작부터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아이들이 자신의 친구를 경쟁의 상대로만 여기고 이기고 딛고 설 대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일은 피할 수 있어서 선택한 일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민의 목적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히 퇴행하고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친 독재자 박정희의 유령이 통치하는 곳에서 마음에 고통을 느끼며 속을 태우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한국을 떠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아이들, 오로지 친구는 경쟁에서 이겨야 할 대상에 불과한 아이들, 휴머니즘이 없는 사회, 정글의 법칙과 적자생존의 원칙이 지배하는 나라, 여전히 국민은 통치의 대상일 뿐 주권자로 대우받지 못하는 대한민국, 그 곳에서 아이들을 키울 자신이 없기 때문에 나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Jacaranda가 흐드러지게 핀 시기에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여유롭게 자연을 관조할 여유는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니 견딜 만은 합니다.

 


윤도현, 김제동, 그리고 다음은 누구인가? 정치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도 별로 없을 것이다. 누구나 민주주의에 대하여 소중한 가치를 부여한다. 심지어 북한도 자신들의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말을 넣어 사용한다. 노골적으로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나설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우리는 비민주적 또는 반민주적 행태를 너무 쉽게 목도할 수 있다. 아마도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제각각 다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르게 정의하는 정도를 넘어 아예 틀린 정의를 내려두고 그것에 입각해서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전히 군사독재의 후유증을 앓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오로지 공산주의의 반대말에 불과하다. 그렇게 교육되고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공산주의의 반대말이 아니다. 백성이 스스로 주인 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는 것이 민주공화국이다. 공산주의는 경제적 가치를 공동 생산하여 공동 분배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 둘은 본래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공산주의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파괴될 위험성이 높고, 실제로 공산국가들이 하나같이 혹독한 독재정치로 흘러서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은 것은 이미 역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쉽게 말해서 주권자인 백성이 타인의 자유를 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면 그 나라는 민주국가이다. 더 쉽게 말해서 백성이 마음껏 정권을 비판할 수 있으면 그 나라가 바로 민주국가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일까?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해야 옳다. 대한민국의 헌법에는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다. 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그러니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스스로의 자유를 누리고 정권에 대하여 마음껏 비판도 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국민의 말할 자유가 그리 잘 보장되는 것 같지 않다. 이상한 행동을 하는 보수단체들은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있는 반면에 진보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말도 하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은 좀처럼 하기 어려운 분위기이다. 

 

현 정권 초기에 한 네티즌이 정부정책에 대하여 비판적인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검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지만 그는 이미 상당한 벌을 받은 후였다. 구속 수감되어 재판을 받는 것은 형벌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시범케이스에 걸린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수입위생검역조건 완화에 반발하여 촛불집회가 있었다. 그 집회에 참가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경찰의 조사를 받고 처벌된 일도 있었다. 정권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나서서 반대하지 말라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광우병에 대한 우려를 보도한 MBC PD수첩의 제작진까지 검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고 있다. 정권에 비판적인 멘트를 했던 앵커도 자리에서 쫓겨났다. 비판하는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전 정권에 호의적이었던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밀려나는 일도 여러 사례가 있다. 가수 윤 도현이 오랫동안 진행하던 '러브레터'의 진행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최근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당일 노제를 진행했던 김제동이 '스타골든벨'에서 밀려났다. 이 지점에 이르면 치졸한 보복이 가해지고 있다는 느낌마저 지울 수가 없다.

 

국민이 자유롭게 비판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은 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위해하는 일이다. 이쯤 되면 정말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엄연한 사실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헌법이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내용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사상의 자유,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이 모두 심각한 침해를 당하고 있다.

 

지난 정권에서는 대통령 욕하고 모욕하는 일이 마치 유행병처럼 번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대통령을 심하게 욕하고 비난해도 권력이 그것을 막으려 들지 않았다. 누구도 정권을 비판하는 일에 심리적 부담을 느끼는 일이 없었다. 언론들도 연일 비난을 퍼부었지만 보복을 당하지 않았다.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출판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만개하고 있었다. 그런 것이 민주국가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정권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이렇게 판이하게 다른 나라가 되어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가 지금 대한민국에 등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아무도 비판할 수 없는 권력은 필연적으로 썩게 마련이다. 부패는 곧 주변으로, 주변으로 번질 것이다.

 

그렇게 후퇴한 민주주의는 저절로 살아나지 않는다. 각고의 노력이 있은 후에 회복된다 하더라도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어있다. 매우 소중한 것이 심각히 퇴행을 하고 있다. 그래서 걱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50%를 넘는 고공행진을 하고 있단다. 국정수행에 대한 지지율이 이정도 라면 말할 자유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히려 여러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혼란이라 여기고 정권의 강력한 통제를 수용하는 태도마저 보인다. 아마도 독재의 후유증이 아닐까 싶다. 오랜 왕정과 일제의 식민통치, 그리고 기나긴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그렇게 통제에 익숙해진 탓일 것이다.

 

국민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 특히 마음껏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는 것은 경제성장률 몇 퍼센트와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또 국민의 자유가 제한된다 하더라도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부디 국민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소중히 지키고 누릴 줄 아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자신의 정치적 소신으로 인하여 보복당하는 그런 사회는 결코 누구에게도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특정 연예인의 생계문제가 아니다. 다름에 대한 포용과 인정이 없다면 이 세상은 항상 전쟁터가 될 것이다. 다른 견해가 서로 존중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다. 대한민국은 어디로 향해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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