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치상황, 한국교회, 그리고 비판 인권과 평등,종교

지인 가운데 한 사람은 내게 '이제 한국정치에 관심두지 말고 이민생활이나 잘 적응하라'고 권유한다. 또 어떤 분들은 '비판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해진다'며 가급적 비판을 삼가라고 권한다.


한편으로는 수긍이 가는 권유가 아닐 수 없다. 사실 형편이 그리 넉넉지 못하면서 먼 고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가진들 그리 개인적으로 유익할 리가 없다. 비판을 하는 것보다 현실이 행복하다고 스스로 자기최면을 거는 쪽이 훨씬 행복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판은 포기할 수 없는 애정의 다른 이름이다. 대상에 대한 애정이 결여된 경우라면 비판할 동기가 사라지고 만다. 무관심한 대상에 대하여 누가 비판을 하겠는가?


물론 비판은 확고히 공익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며, 확고한 사실에 기반을 둬야 한다. 공익이 아닌 사리를 목적으로 한다면 그 것은 음흉한 모략이 되고, 또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았다면 그 자체로 비방이나 비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정치에 대한 비판,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이 모두 나름 내 방식의 애정을 표현하는 것임을 이해해주면 좋겠다. 내가 45년 이상을 살아왔던 대한민국에 대하여 어떻게 순식간에 애정을 접을 수 있겠는가? 성인이 되기도 전부터 몸담았던 교회에 대하여 무슨 수로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다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자. 대한민국의 헌법은 엄중하게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하고 있다.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도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뭔가 민주국가로서는 영 체통이 서지 않는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사 중에 한 대목이 기억에 있다. "전직 대통령이 존경받는 풍토를 만들겠
다."는 대목이다. 그동안 끝없이 이어지던 전직 대통령들의 퇴임 후 불행한 모습들이 이제는 사라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었다. 그런데 취임하자마자 곧장 국가기록물 유출 건으로 흠집을 내더니 마침내 가족들과 측근기업인의 돈거래를 빌미로 친인척은 물론 중병에 신음하던 측근들조차 모조리 사법적 가해를 당했다. 결국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


정권을 잡고 곧장 지난 정권이 했던 모든 일을 무위로 돌리는데 그야말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남북관계나 미국산 쇠고기 문제가 그렇고, 한반도 대운하와 4대강 토목공사가 그렇다. 권력기관의 독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세종시의 백지화 움직임도 그런 맥락의 일환이다.


자신들은 지난 10년간 마음껏 비난의 자유조차 누렸지만 이제는 비판적인 언론과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있다. 뉴스에서 퇴출된 신경민 앵커, 시사토론의 정관용씨, 백분토론의 손석희씨, MBC PD수첩 관련자들, 가수 윤도현, 방송인 김제동등 모두가 시청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정권에 밉보여서 쫓겨났다. 지난 정권에서 유인촌, 이덕화, 백일섭, 김흥국 등 모두가 거리낌 없이 활동하던 것에 비교해볼 문제이다.


미디어 관련법의 처리과정에서는 민주주의의 사망을 보는듯한 느낌마저 든다. 야당의원들의 의결권을 강압으로 막았고, 자신들끼리는 서로 대리투표를 하는 등 차마 민주국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다. 국민의 다수가 반대하는 일을 이렇게 절차법을 어기며 처리하는 것이 민주국가의 국회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또 매우 비겁하고 우스운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의결과정에서의 문제는 많았지만 결과를 무효로 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절차적 결격이 있는 법률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앞으로 국회법은 지킬 필요가 있을까? 600년 전 경국대전을 근거로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법률을 무효로 했던 판결처럼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판결이 또 하나 탄생하였다.


헌재의 판결에 대한 패러디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당선은 되었지만 대통령은 아니다.'라거나 'BBK를 설립은 하였으나 내 것은 아니다.'하는 식이다. 또 '강간과 폭행은 했지만 범죄는 술이 저질렀다.'거나 '선거법을 위반했지만 당선은 유효하다.'는 등 온통 헌재와 사법부를 불신하는 조롱이 담겨 있다. 심지어 '헌재가 판결은 했으나 유효한 것은 아니다.'고 신랄하게 헌재의 결정자체를 빗댄 패러디도 있었다.


행정부의 권력에 대한 불신이 있다면 국회가, 국회도 믿을 수 없다면 최소한 사법부는 균형자적 역할을 해줘야 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국민의 절망감은 점점 더 깊어가는 것이다.


이제 국민들도 눈치를 살피며 생각을 감추기에 바쁘다. 10월 28일에 있었던 재보선의 결과에서 나는 국민들의 마음을 보았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50%를 넘어 청와대가 자축하는 분위기에서 치러진 재보선의 결과치고는 여당의 대참패가 아닐 수 없다. 그 간의 여론조사가 조작되었거나 아니면 국민들이 여론조사에서 자신의 마음을 숨겨왔던 것이다.


언론은 연일 집권세력의 비위를 맞추는데 여념이 없다. 언론이 권력과 유착을 형성하는 것은 그 사회에 비판기능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비판받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할 뿐 아니라 패망을 향해 질주하는 폭주기관차에 다를 바가 없다.


비판받지 않아서 부패한 전형적인 예가 종교에 있다. 가톨릭은 절대 권력을 향유하며 부패했었다.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생겨난 종교였으나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신도들과 엄격히 구분된 성직자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바빴다. 자신들이 스스로 신이 되어 면죄부를 팔아먹는 등 타락이 극에 달하며 종교개혁 운동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물론 종교개혁을 주도한 자들의 동기를 의심하는 설도 있지만 그렇게 가톨릭의 부패에 대한 반향으로 신교가 탄생하였다. 성직자와 신도를 계급으로 분류하여 엄격히 속박하고 비판을 막아온 결과물이 극악한 부패로 나타났다. 또 자신들의 부패상을 감추기 위해서 마녀사냥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탄생한 신교는 또 어떤가? 특히 한국교회 다수의 목회자들은 부패에 침묵하였으며, 독재 권력에 영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빛과 소금의 역할은 외면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대하는데 몰두하였다. 거대한 교회건물이 그 자체로 기득권이 되고 신도들은 비판할 자유를 잃었다. 심지어 목회자가 무고한 사람들을 저주해도 "아멘"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성서에는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이런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은 사랑의 위대함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 말씀이 비판하는 입을 막는데 동원되고 있다. 교회의 잘못, 목회자의 잘못, 심지어 교회 내 다른 신도들의 잘못을 덮고 쉬쉬하자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비판이 횡행하면 교회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임을 이해는 하지만 비판을 막기 위해서 동원할 말씀은 아닌 것이다.


결국 한국의 초대형 교회들이 그렇게 비판하는 입을 막아놓고 자식들에게 거대한 교회건물과 부동산과 기득권을 세습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출석 신도수와 헌금액수를 계산하여 교회를 사고파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여신도와 간통하다 들통이 나자 도망가다 떨어져 죽는 일까지 생겼다. 또 기독교인들이 똘똘 뭉쳐서 정치권력까지 장악하려는 모습도 비판해야 될 일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려거든 비판에 직면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수는 당시의 로마통치와 식민지 유대민족의 통치자들에 통렬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유대교의 제사장들과 율법을 숭상하는 바리새인들을 참소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일갈하던 모습은 여인의 간통을 비호한 것이 아니라 다중의 죄와 무자비하고 부당한 처벌을 비판하는 장면이다. 종교개혁도 잘못에 대한 비판에서 가능한 일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모습이야말로 절실히도 비판이 가해져야할 대상이다. 이민생활이 고달프지만 내가 나서 자란 조국을 사랑하지 않고 무관심할 수가 없고 뿐 더러 그리 옳은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갈수록 빛과 소금의 역할을 포기하고 부패를 재촉하는 균주처럼 변하는 것을 외면하고 사는 것도 그리 좋은 태도는 아니다.


사익을 추구하기에는 비판이 장애가 될 것임을 잘 안다. 그러나, 애정이 있다면 썩어서 뭉그러지기
전에 비판하는 것이 옳다. 허물어지는 민주주의를 그저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점점 부패하여 소돔과 고모라처럼 변모하는 교회를 보고 기도만 하고 앉아 있어도 변화는 없다.


사랑한다면 비판하자. 그러나 인신공격이나 허위의 사실에 근거하여 비방이나 비난을 하지는 말자. 철저히 사실에 기반을 둔 비판, 철저히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비판, 사익을 추구하지 않는 애정 어린 비판이 우리사회를 좀 더 사람 사는 세상에 가깝게 하는 것이 아닐까? 비판은 돌을 던져서 상대를 죽이는 행위가 아니고 애정을 담아 더 나은 지향점을 모색하는 일일 뿐이다.


시드니에서 이민생활 5개월 사회,문화,교육

어느덧 한국을 떠나 이 곳에 온 지 5개월이 되었습니다. 악명 높았던 독재자 박정희가 부하의 손에 최후를 맞은 역사적인 날이기도 하군요. 곳곳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을 보면서 이 곳에 온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이 꽃이 바로 Jacaranda이며, 원산지는 남미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시드니에는 보라색 Jacaranda가 만개하였습니다. 이 곳의 본격적인 봄을 알리는 전령사쯤 되는 꽃이라고 하겠습니다. 곳곳에 보라색이 찬란하게 물든 광경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 봄을 알리는 벚꽃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꽃이 호주의 12학년 학생들에게는 매우 반갑지 않은 꽃이라도 합니다. 바로 이 꽃이 만발하는 시기에 그 들은 대학입학을 위한 HSC(Higher School Certificate)을 보아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모두가 봄의 정취를 만끽하는 때에 그들은 중요한 시험을 거쳐야 하니 그리 반갑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곳에도 역시 학생들에게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아이들을 공부와 시험의 지옥에서 해방시키려고 했지만 여기서도 역시 완전한 해방을 선사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좀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한국에서의 편리한 생활을 뒤로 하고, 많은 지인들과의 따스한 교류도 접어둔 채 이곳에 온 이유가 희석되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곳에 와서 문득문득 약한 향수에 젖어 막연히 한국을 그리워하는 일조차 이미 감내하기로 했는데, 이 곳도 역시 입시라는 것이 우리아이들을 괴롭힐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그리 달갑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역시 한국을 떠난 목적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이내 자위하게 됩니다. 우선 대학입시라고 하더라도 한국에서의 그 것과는 직접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대학을 한 줄로 완벽하게 서열화시켜 놓고 소위 말하는 인류대학을 가기 위해서 목을 메는 현상이 이 곳에는 없습니다. 이 곳도 역시 평판이 좋은 대학이 있고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대학이 있지만 뚜렷한 서열을 매기기는 좀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 또 평판이 좋은 대학을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 것이 곧 그 학생의 밝은 미래를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좀 평판이 낮은 대학을 나온다고 사회에 진출할 때 특별히 불리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또 경쟁의 강도도 한국의 그 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외고나 과학고 등에 진학하는 것이 유리하고, 그런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중학생들이 엄청난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사교육비를 엄청나게 지출하며 하루 종일 공부하는 경우도 있으니 확실히 이곳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이 곳에서도 한국이나 중국 그리고 인도출신학생들의 경우 Primary School부터 Selective에 진학하려고 사교육을 시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학생들이 평판 좋은 대학에 많이 진학하는 것도 역시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 것이 그들의 인생전체를 결정짓는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처럼 일류대학을 나오면 대기업에 들어가서 시작부터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10학년을 마치고 TAFE에 가서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훨씬 높은 보수를 받고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학력이 높은 사무직과 현장에서 노동하는 기술직이 서로 계급적 차이를 인식하는 것도 아닙니다. 각자 다른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나에게는 훨씬 편안한 한국생활을 접고 아이들을 무한경쟁의 늪에서 탈출시킨 것을 옳은 결정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5개월에 불과한 이 곳 생활에 우리 부부도 아이들도 그리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당히 불편하고 마음에 맞지 않는 일도 많습니다. 하지만 다소간 각오를 했던 일이기에 당황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에서 작은 중소기업이지만 임원으로 편하게 생활하던 것에 비하면 지금 내 생활은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러 가는 아내를 기차역에 내려주고, 아이들을 학교까지 태워다 주고 나서 TAFE에 갑니다. 3시쯤 끝나면 다시 아이들과 아내를 태워서 집에 옵니다. 잠시 한 숨을 돌리고는 5시에 나가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뭐 그리 꺼릴 것이 없으니 공개하자면 큰 회사의 사무실을 청소하는 일입니다.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열심히 하고 시급으로 12불을 받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수입이라곤 집세의 절반도 안 되는 푼돈에 불과합니다.

 

Center Link에서 2주마다 아이들 키우라고 주는 돈까지 합해서 겨우 집세를 낼 수 있을까 말까 합니다. 나머지 생활비와 공과금 등은 모두 한국에서 가져온 돈을 야금야금 헐어 쓰고 있습니다. 물론 TAFE에 다니지 않고 적극적으로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생활비는 충당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곳에 살려면 적어도 의사소통을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수준의 영어는 해야 하고, 또 장차 안정된 일을 얻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하기에 은행잔고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 온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영어 한마디도 못하고 한국인하고만 아울려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나름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리 따라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도 이 곳에서 학교생활을 하며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이제 1학년인 작은 애는 별로 언어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그냥 어울려서 잘 노는 편이죠. 그런데 5학년인 딸아이는 그렇지 못합니다. 한국의 강도 높은 경쟁과 시험에서 해방된 대가를 나름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입니다.

 

사실 온 식구가 적응을 위한 몸살을 앓고 있어서 지금은 그리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나마 지금은 훨씬 나아진 셈입니다. 처음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 암담했습니다. 마치 이 곳이 추운 겨울이어서 날씨부터 고통스럽기만 했습니다. 기거할 집을 구하기도 만만치 않게 어려웠고, 언어장벽에 대한 공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고통은 마음의 고통이었습니다. 한국을 떠나오던 때에 고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장 기간이었습니다. 한국의 정치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휴머니스트를 가슴에 묻어야 하는 고통이 컸습니다. 정신이 없고 힘든 시간 중에도 문득문득 그분의 서거가 가슴속에 분노를 자아내게 만들었습니다. 누가 이렇게까지 만들었는가를 생각하며 분노하고 도 분노했습니다. 시드니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분향을 하고 49재를 한인들과 함께 준비하고 치르면서 분노를 다스렸습니다.

 

가슴속의 분노가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이번에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서거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 한국의 민주주의, 지역주의 정치에 대한 문제의식, 빈부격차의 해소 등을 추구하던 두 분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것이 지금도 분하고 화가 납니다. 화를 다스리는데 여전히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사에 긍정적 의미와 커다란 족적을 남기신 두 분을 한꺼번에 잃은 분노가 하필이면 이민생활 시작부터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아이들이 자신의 친구를 경쟁의 상대로만 여기고 이기고 딛고 설 대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일은 피할 수 있어서 선택한 일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민의 목적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히 퇴행하고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친 독재자 박정희의 유령이 통치하는 곳에서 마음에 고통을 느끼며 속을 태우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한국을 떠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입시지옥에 시달리는 아이들, 오로지 친구는 경쟁에서 이겨야 할 대상에 불과한 아이들, 휴머니즘이 없는 사회, 정글의 법칙과 적자생존의 원칙이 지배하는 나라, 여전히 국민은 통치의 대상일 뿐 주권자로 대우받지 못하는 대한민국, 그 곳에서 아이들을 키울 자신이 없기 때문에 나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Jacaranda가 흐드러지게 핀 시기에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여유롭게 자연을 관조할 여유는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니 견딜 만은 합니다.

 


윤도현, 김제동, 그리고 다음은 누구인가? 정치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도 별로 없을 것이다. 누구나 민주주의에 대하여 소중한 가치를 부여한다. 심지어 북한도 자신들의 국호에 민주주의라는 말을 넣어 사용한다. 노골적으로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나설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우리는 비민주적 또는 반민주적 행태를 너무 쉽게 목도할 수 있다. 아마도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를 제각각 다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르게 정의하는 정도를 넘어 아예 틀린 정의를 내려두고 그것에 입각해서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전히 군사독재의 후유증을 앓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오로지 공산주의의 반대말에 불과하다. 그렇게 교육되고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공산주의의 반대말이 아니다. 백성이 스스로 주인 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는 것이 민주공화국이다. 공산주의는 경제적 가치를 공동 생산하여 공동 분배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 둘은 본래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공산주의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파괴될 위험성이 높고, 실제로 공산국가들이 하나같이 혹독한 독재정치로 흘러서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은 것은 이미 역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과연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쉽게 말해서 주권자인 백성이 타인의 자유를 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면 그 나라는 민주국가이다. 더 쉽게 말해서 백성이 마음껏 정권을 비판할 수 있으면 그 나라가 바로 민주국가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일까?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해야 옳다. 대한민국의 헌법에는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다. 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그러니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스스로의 자유를 누리고 정권에 대하여 마음껏 비판도 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의 대한민국은 국민의 말할 자유가 그리 잘 보장되는 것 같지 않다. 이상한 행동을 하는 보수단체들은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있는 반면에 진보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말도 하기 어려운 사회가 되었다.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은 좀처럼 하기 어려운 분위기이다. 

 

현 정권 초기에 한 네티즌이 정부정책에 대하여 비판적인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검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지만 그는 이미 상당한 벌을 받은 후였다. 구속 수감되어 재판을 받는 것은 형벌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시범케이스에 걸린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수입위생검역조건 완화에 반발하여 촛불집회가 있었다. 그 집회에 참가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경찰의 조사를 받고 처벌된 일도 있었다. 정권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나서서 반대하지 말라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광우병에 대한 우려를 보도한 MBC PD수첩의 제작진까지 검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고 있다. 정권에 비판적인 멘트를 했던 앵커도 자리에서 쫓겨났다. 비판하는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전 정권에 호의적이었던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밀려나는 일도 여러 사례가 있다. 가수 윤 도현이 오랫동안 진행하던 '러브레터'의 진행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최근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당일 노제를 진행했던 김제동이 '스타골든벨'에서 밀려났다. 이 지점에 이르면 치졸한 보복이 가해지고 있다는 느낌마저 지울 수가 없다.

 

국민이 자유롭게 비판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은 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위해하는 일이다. 이쯤 되면 정말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엄연한 사실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헌법이 분명히 선언하고 있는 내용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사상의 자유,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이 모두 심각한 침해를 당하고 있다.

 

지난 정권에서는 대통령 욕하고 모욕하는 일이 마치 유행병처럼 번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대통령을 심하게 욕하고 비난해도 권력이 그것을 막으려 들지 않았다. 누구도 정권을 비판하는 일에 심리적 부담을 느끼는 일이 없었다. 언론들도 연일 비난을 퍼부었지만 보복을 당하지 않았다.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출판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만개하고 있었다. 그런 것이 민주국가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정권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이렇게 판이하게 다른 나라가 되어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가 지금 대한민국에 등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아무도 비판할 수 없는 권력은 필연적으로 썩게 마련이다. 부패는 곧 주변으로, 주변으로 번질 것이다.

 

그렇게 후퇴한 민주주의는 저절로 살아나지 않는다. 각고의 노력이 있은 후에 회복된다 하더라도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어있다. 매우 소중한 것이 심각히 퇴행을 하고 있다. 그래서 걱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50%를 넘는 고공행진을 하고 있단다. 국정수행에 대한 지지율이 이정도 라면 말할 자유 같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히려 여러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혼란이라 여기고 정권의 강력한 통제를 수용하는 태도마저 보인다. 아마도 독재의 후유증이 아닐까 싶다. 오랜 왕정과 일제의 식민통치, 그리고 기나긴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그렇게 통제에 익숙해진 탓일 것이다.

 

국민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 특히 마음껏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하는 것은 경제성장률 몇 퍼센트와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또 국민의 자유가 제한된다 하더라도 경제성장률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부디 국민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소중히 지키고 누릴 줄 아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자신의 정치적 소신으로 인하여 보복당하는 그런 사회는 결코 누구에게도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특정 연예인의 생계문제가 아니다. 다름에 대한 포용과 인정이 없다면 이 세상은 항상 전쟁터가 될 것이다. 다른 견해가 서로 존중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다. 대한민국은 어디로 향해가는 것일까?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시드니 한인사회 인권과 평등,종교

시드니의 한인사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한인들이 교회에 모여서 이국땅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달래고, 서로 정을 나눈다. 또 때로는 신에게 의지하여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렇게 교회에 모여서 신앙적 공감을 나누고 때로는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것은 무척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그렇게 교회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뿌듯함마저 느끼게 하는 소중한 커뮤니티다.

 

그러나 지나침은 모자람만 같지 못하다는 옛 성현의 말씀이 있다. 말하자면 정도를 지나친 공동체 의식과 과도한 연대감이 그 공동체외의 사람들에게 소외를 느끼게 만드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한다. 특히 기독교 신앙에 부정적인 한인들에게는 대다수가 교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진 모습이 그리 달가울 리가 없다.

 

거기에 더하여 신앙을 핑계 삼아 교회에 들어간 후 교인들을 대상으로 비즈니스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물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비즈니스라면 그조차 그리 문제가 아닐 테지만 누군가의 피해를 피할 수 없는 비즈니스의 경우엔 좀 심각해진다.

 

예를 들어 다단계 사업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다단계는 무한히 증식될 수가 없다. 한계에 달하여 더 이상의 증식이 어렵게 되면 마지막 단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고스란히 경제적 피해를 떠안고 만다. 교회공동체를 발판삼아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때로는 정치적 편향성을 공유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일도 일어나곤 한다. 합리적 근거도 없이 특정한 정파의 이익에 종사하는 패거리를 형성하는 일이 있다. 마치 한국사회에서 기독교가 특정정파의 편에 서서 정치적 행위를 하는 일들을 연상하게 만드는 일이다. 좁은 한인사회에서 교회공동체의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특히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날 한국교회가 신앙의 대상인 예수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으로 이익집단이 돼가는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의 삶은 자신을 희생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끝이 난다. 그는 기득권자들의 탐욕을 나무랐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 그리고 어린이를 존중히 여겼다. 그의 모든 행보는 약자와의 연대로 집약된다. 그는 또 기존의 사회질서와 율법에 사로잡힌 자들의 형식주의를 질타한 바가 있다. 말하자면 당시의 기득권층에게 그는 반체제 인사였다.

 

모두에게 서로 사랑함은 물론 욕심을 버리고 나눌 것을 설파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적 질서와는 상극인 삶을 살다 갔다. 그 것도 탐욕에 물든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 끝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면서 삶을 마쳤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공고히 형성된 자본주의적 질서를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자신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 남긴 교훈들을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돌아보면 예수는 단지 교회를 광고하기 위한 모델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교회들이 하는 일마다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부를 축적하고, 그 것을 대물림하며, 나누고 베풀기 보다는 움켜쥐고,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어린이를 귀히 여기기보다는 재산을 많이 가지고 헌금을 많이 할 수 있는 자들에게 매우 달콤한 설교를 늘어놓는다.

 

정치적으로는 자본가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파에게 무조건적 지지를 보내고 있다. 예수는 저만큼 멀리 쫓겨나고 부자들만이 득실대는 모습을 하고 있다. 교회전단지에 등장하는 예수는 그저 교회의 광고모델에 불과해 보인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바에는 왜 그를 광고모델처럼 동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을 예수께서 본다면 아마도 회칠한 무덤이라 할 것이다. 또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던 때의 모습보다 더욱 강렬하게 분노할 것이다. 약자보다는 강자들에게 붙어서 기득권을 적절히 옹호해주고 그들에게 경제적 보상을 받는 교회에 이미 예수는 너무도 멀리 쫓겨나고 없다.

 

지금 시드니를 중심으로 호주에 정착한 한인사회가 교회를 통해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서로 의지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것이 지나치게 편향된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지금 회칠한 무덤이라 비판받는 한국의 초대형 교회들을 답습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제 한인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일에만 더욱 몰두할 것이 아니라 교회공동체가 한인들의 사회 속으로 나아가서 역할을 찾고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적어도 약자와의 연대라는 예수의 사상을 부인해선 안 될 것이다.

 

혹시라도 자신이 예수의 반대편에 서서 그에게 비판받던 기득권층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돌아봐야한다. 기득권자들의 쏟아지는 비난에도 굴하지 않았던 예수를 신앙한다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버둥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편 갈라서 약자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좁은 울타리를 만들어서 누군가 힘없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두 돌아볼 일이다.

 

이국땅에 모인 한인들이라도 교회와 사업과 돈만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과 포용과 약자에 대한 배려를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예수의 뜻이고, 그에게 대적하지 않는 일이다. 한국의 초대형 교회들을 좋다고 본받을 일이 아니라 그들과는 전혀 다른 곳에 진리가 있음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결코 자본가와 기득권층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지금 다시 이 땅에 온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런 타협은 없을 것이다. 시드니에 한인교회들이 서로 협력하고 선을 이루는 모습을 보고 싶다. 부자들이 아닌 예수를 신앙하는 진실한 모습을 보고 싶다. 돈이 아닌 이웃사랑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배제하고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편안한 이웃이었으면 좋겠다. 무리한 바램일까?

 

부디 한국의 대형교회와는 좀 다른 모습이길 소망한다.

 

 


정운찬, 정몽준, 정동영 그리고 노무현의 평가 정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소식을 접하며 경황없이 먼 이국 땅으로 날아온지 이제 4개월이 되어 간다. 그 동안 너무 가슴이 아팠고 말문이 막혀서 그 일에 대하여 글하나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마음은 아프지만 이제 그 분의 유지를 상기하며 추억할 수 있는 여유를 찾아가고 있다. 오늘은 그 시작으로 각별한(?) 인연으로 대비되는 세 명의 정씨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싶다.

 

정운찬

 

지금 이명박 정권은 정운찬씨를 총리에 임명하려고 한다. 이미 인준을 위한 청문회에서 수 많은 결함과 결격이 밝혀진 상황임에도 압도적 의석수를 믿고 인준을 강행할 모양이다. 참으로 도의란 모르는 집권세력이다. 납세의 의무를 태만히 하였던 사람, 특별한 용돈을 받아 쓴 사람, 수상한 소득이 수억원에 달하는 사람이 과연 대한민국의 국무총리에 적합하다면 그 나라는 이미 그런 수준의 나라밖에는 안되는 것이다. 하기야 대통령의 도덕성이 그보다 결코 나을 것 없는 상황에서 누구를 탓하랴마는...

 

그가 서울대 총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에 남긴 유명한(?) 대사가 떠오른다. 바로 3불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던 노무현 정권을 향하여 던진 말이다. "원재료가 좋아야 좋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다."고 일갈하였다. 3불정책으로 대학들이 좋은 학생을 골라서 입학시키기 어렵다는 비판이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정권의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서 후일에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는 의도도 담았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그가 그렇게도 강력히 비판하던 MB정권에 몸담으려는 것으로 보아 충분히 정치적인 인물임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소신을 버리기에 주저함이 없는 인물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루아침에 정권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접고 별반 차이점이 없다고 표변할 리가 있겠는가?

 

다시 원재료 론으로 돌아가자면, 누구도 수긍하기 어려운 어불성설이다. 과연 지금 서울대를 비롯한 우리의 대학들이 원재료를 잘 고르지 못해서 훌륭한 인재를 만들지 못하고 출세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별 볼일 없는 졸업생들을 배출하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상식이다. 지금도 그 들은 충분히 훌륭한 원재료를 골라서 데려가고 있다. 다만 공정이 잘 갖춰지지 못한 나쁜 공장과 엉터리 기술자들에 의하여 품질이 떨어지고 불량률이 높아진 것이다. 엉터리 기술자 주재에 무슨 원재료 탓을 할 처지인가?

 

그가 참여정부 말기에 갑자기 대선주자군으로 주목을 받은 일이 잠시 있었다. 경제학자에다 서울대학교 총장이라는 타이틀이 대중의 착시를 일으켰음 이리라. 그는 마치 자신의 몸값이라도 높이려는 듯 한껏 교만을 부린다. 노무현 전대통령이 그를 겨냥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한마디 던진다. "정치인이란 이것저것 눈치살피고 기회를 노릴 것이 아니라 몸을 던져서 헌신한 후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고 하였다. 기회주의적 처신에 대한 멋진 일갈이 아닐 수 없다.

 

철학도 보이지 않고, 소신도 쉽게 굽히며, 도덕성에 의문이 많은 그가 국무총리가 된다면 이는 대한민국이 또 한번 부끄러운 나라가 되어가는 증거가 될 것이다. 자신의 어설픈 기술을 탓하기 보다 엉뚱하게 원재료를 탓하는 교만함이 과연 총리자리에 어울린다면 할말을 잃고 어안이 벙벙해질 따름이다.

 

정몽준

 

거대한 집권여당의 당대표를 승계하였다. 아버지를 잘만나 거대한 부를 물려받은 것도 그렇고 박희태 대표의 사퇴로 인하여 당대표가 된 것도 그렇고 그에게는 과분해 보인다. 그다지 사려깊은 행실이 있는 것도 아니요, 철학이나 소신도 보인 바가 없는 그에게는 참으로 과도한 것이 현재의 위상이다.

 

아버지가 잠시 정치를 하며 대통령에 출마했을 당시 그는 그 유명한 초원복국집 불법 도청을 자행한 사람이다. 물론 불법행위를 찾아서 고발한 것을 잘못이라 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폭로가 오히려 지역감정을 더욱 자극하고 정적의 승리를 확고히 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을 상기하면 참으로 정치적 계산이 짧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또 월드컵 4강신화에 기반하여 대선후보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그가 축구협회장으로서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신화를 지원했던 것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축구 대표팀을 좀 잘 지원해서 성과를 얻었다고 스스로 대권을 꿈꾼다는 것은 좀 어이가 없었다.

 

후에 그는 결국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로 물러나고 지원유세에 나섰다. 철없는 그의 지지자들은 유세현장에서 성급하게 '차기 정몽준'을 외친다. 노무현 후보는 단호히 말한다. 너무 앞서가지 말라는 것이다. "추미애도 있고, 정동영도 있고..."라며 제동을 걸었다. 물론 정몽준은 곧장 삐져서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고 발표를 한다. 그 것도 대선이 하루 남은 상황에서 치명상을 입히고자 했던 것이다.

 

조선일보의 일면 탑 제목 "정몽준마저 노무현을 버렸다."는 섹시함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후보는 당선되고 말았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정치행보를 했던 그가 지금 거대여당의 대표가 되었다. 노무현이 뻔히 불리할 것을 알면서도 그와는 정체성이 다르다며 단일화 협상을 거부했던 이유가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 수준의 정치행보를 하는 사람이 집권여당의 대표이자 차기후보군으로 분류된다는 것이 서글픈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래서 슬프다.

 

정동영

 

당과의 일체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출마를 언론에 알린 후 공천이 안되자 탈당하여 당과 정면 대결을 벌인 그가 당선되고 말았다. 유권자들이 곰곰히 생각해볼 일이다. 그런 자의 복당을 운운하는 움직임이 있는 모양이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해당행위를 한 자를 다시 받아들인다면 그 것은 이미 공당의 모습이 아니다.

 

참으로 구차한 정치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당이 어려울 때 나름의 정치적 지명도를 지닌 인물이 당을 위해서 수도권에 출마하여 싸우는 헌신이 필요했지만 그는 그 것을 거부하고 지역기반에 기대어 정치적 재기를 모색한 것이다. 정치인이 어떤 희생도 치르지 않고 자신의 입지만을 추구한다면 국민은 그 만큼 불행해질 것이다.

 

그는 이미 그런 행보에 익숙한 사람이다. 2002년 대선 때는 민주당 경선에 출마를 했었다. 당시 이인제 씨와 함께 노무현 후보의 장인이 좌익활동을 했다는 것을 문제삼아 색깔론을 강력히 들고 나왔던 그이다. 그러던 그가 다른 후보들이 줄줄이 사퇴하자 경선지킴이를 자처하며 입지를 다져 나갔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자 그는 곧장 당을 장악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고, 이미 기득권을 차지한 당권파와의 일전을 치른 끝에 분당을 결행하였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데 앞장선다. 물론 열린우리당이 전혀 새로운 정당 민주주의를 골간으로 했다는 점에서 평가할만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그 것마저 허무는데 노력을 다한다.

 

당원들의 참여와 결정에 의하여 당권은 물론 중요한 공직선거 후보자가 결정되는 것은 매우 발전된 정당민주주의의 한 형태였다. 하지만 그러한 정당민주주의가 자신의 차기후보 자리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보이자 그는 그 것을 스스로 부정하고 흔들고 마침내 허물어 버리고 말았다. 온갖 부당한 동원과 편법으로 대통합 민주신당의 후보가 되었으나 결국 별반 지지를 받지도 못하고 처절한 패배를 맛보고 말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진 정동영에 대한 생각은 어떤 것일까? 퇴임하고 봉하마을에 정착한 후 지역의 노사모 회원들과 그 곳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장군차 나무를 심으며 담소하는 가운데 한 사람이 지난 대선에 누구를 찍었는지 물었다. 듣는 이들은 참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처럼 민망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무현 전대통령은 꺼리낌없이 대답을 한다. "찍을 사람을 찍었어요. 안될 것 같아서 찍었어요. 될 것 같았으면 내가 그 놈을 찍었겠습니까?" 상당한 시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마지막 들은 노무현의 유지로 남아 있다. 그의 마음속에 정동영에 대한 원망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의미있는 시도라 여길만했던 정당민주주의를 통채로 망가지게 만들었던 그의 정치행보를 기억한다면 매우 공감가는 일갈이 아닐 수 없었다. 헌신하고 룰을 지키며 노력한 후 국민의 선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불리하면 모든 룰을 송두리채 부정해 버리는 태도는 정치지도자가 넘어서는 안될 금도를 넘어버린 것이다.

 

결론

 

노무현 전대통령과 그가 추구하던 가치가 무참히 짖밟힌 상황에서 목숨마저 던져야 했던 한국의 정치현실이 슬프다. 그런 그가 못마땅해 하던 그 3명의 정씨가 지금 한국정치의 전면에 나서서 설치는 판국이 더더욱 슬프고 못마땅하다. 이렇게 엉터리 정치판을 만들고 이끌어 가는 정권에게 여전히 높은 지지율을 선물하고 있는 국민들이 원망스럽다.

 

과연 한국정치는 내면이 없는 가식과 소신이 없는 오락가락 행보와 철학이 없는 임기웅변을 지속해야 하는가? 부자들을 위한 지원과 특혜와 감세를 추구하더라도 서민들과 악수하는 사진 좀 찍어서 보도하면 지지율이 오르는 정치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아마도 국민들이 좀 더 현명하고 지속적인 깨달음을 갖기 전에는 좋은 정치를 꿈에도 다시 맛보지는 못하리라.

 

이 점이 생각있는 사람들을 잠못들게 만드는 안타까움이다. 안타깝고,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오호 통재라 한국의 민주주의여!!!!!!!!!

 


1 2 3 4 5 6 7 8 9 10 다음



호주,이민,교육,시드니

연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