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을 상실한 야당 정치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판에는 야당이 없다. 이름조차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 존재감이 희미해졌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친이계는 여당노릇을 하고 친박계는 야당노릇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진짜 야당은 점점 국민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가는 듯하다. 좋은 야당이 없는 정치는 그 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할 뿐 전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답하기에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혹자는 야당에 주목을 끌만한 인물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또 야당이 여당과 구별될만한 정책적 차별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나라당 내의 양대 계파 간 갈등이 워낙 부각되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모두 일 리는 있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지역구도에 있다. 얼핏 이해가 안 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대한민국의 정치는 지역구도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고, 인구구조의 변화가 지역 구도를 강화하여 지금의 결과를 낳은 것이다.


지역구도 정치의 근원을 살펴보자. 해방과 정부수립 이전부터 영남과 호남간의 지역감정이 존재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문제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집권과 독재 그리고 지역편중 개발에서 태동하기 시작한다. 선거에서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집권세력의 책략(보리문둥이 단결론)이 있었고, 특히 1971년 대선에서 호남의 김대중 후보와 영남의 박정희 후보라는 대결구도는 결과적으로 지역구도의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영, 호남 간 지지도가 그리 확연히 갈리지는 않았다. 차라리 도시와 농촌의 지지가 훨씬 두르러지게 갈려 있었다. 이른바 여촌야도의 구도가 그 것이다. 또 영남도 부산과 경남지역은 김영삼을 중심으로 야당을 지지하는 현상이 뚜렷했기 때문에 여야가 나름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1987년 다시 직선제에 의하여 대선이 치러질 무렵에는 전국이 4등분된 구도를 하고 있었다. 대구와 경북은 민정당과 노태우, 부산과 경남은 통일민주당과 김영삼, 호남은 평화민주당과 김대중, 충청지역은 신민주공화당과 김종필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른 바 지역할거 구도가 완결을 보았다. 그나마 야당이 3개로 나뉘기는 했지만 집권세력을 견제할 수는 있었으니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후에 총선에서 여소야대의 구도가 만들어진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소야대의 정국에 부담을 느낀 집권세력이 인위적 정계개편을 시도하면서 한국정치를 결정적으로 망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노태우의 민정당과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 그리고 통일민주당의 김영삼이 3당 합당을 한 것이다. 김종필이 민자당에 합류한 것은 크게 이상할 것이 없으나 민주화 운동의 한축이었던 김영삼이 참여한 것은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야합이다. 호남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평화민주당의 김대중만 야당으로 남아있는 구도가 되었다. 호남을 제외한 전국이 정치적으로 뭉쳐지고 호남이 고립되는 구도가 된 것이다. 한국정치를 망친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야합은 매우 부당할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한국정치를 망치는데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첫째, 국민이 집권 군사정권을 견제하라고 선출해준 정치인들이 군사정권과 야합 했으니 국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고, 둘째는 정치인들이 신의를 저버리고 이익을 쫓아 야합하고도 집권하는데 성공하여 매우 나쁜 선례가 되었다. 이후 수많은 철새정치인이 탄생하는 시금석이 된 것이다. 셋째는 독재세력을 승계한 자들이 민주주의를 추구하던 정치세력을 압도하는 구도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게다가 3당 야합에 의하여 집권한 김영삼은 사상초유의 외환위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온 국민이 오래오래 기억하고 정치적으로 응징을 가해야할 일이다. 국가부도의 위기를 초래한 집권세력을 쉽게 용서하는 나라는 없다. 물론 10년간 반대세력에게 투표하여 민주화세력의 집권을 가능하게 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높은 한나라당 지지율을 보면 너무 이른 용서가 아닐 수 없다. 이 또한 한국정치가 3당 합당으로 형성된 지역구도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리라.


이제 지역구도 정치의 중심인물들은 모두 정치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문제는 그들이 남긴 정치구도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지금 대표적 야당이라고 하는 민주당은 결국 호남을 지지기반으로 겨우 존립하고 있다. 수도권을 제외하고 나머지 전 지역의 인구를 합해도 영남인구보다 현저히 적다. 이제 지역적 기반을 수호하는 방식으로는 한나라당의 영구집권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지점에 한국정치의 절망적 요소가 자리한다.


지금 민주당의 낮은 존재감은 바로 그러한 구도의 문제이다. 또 거기에 더하여 이명박 대통령이 수도권 패권주의에 앞장선 서울시장 출신이라는 점도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금 한나라당의 내부 마찰은 이런 정치구조 아래서의 차기구도를 둘러싼 득실계산에서 나오는 것이다. 세종시가 중심적 문제처럼 부각되고 있지만 사실은 차기에 누구를 대선후보로 정할 것이냐는 권력다툼의 문제가 더 핵심이다.


친이계는 수도권패권주의를 중심으로, 친박계는 박근혜 전대표의 높은 지지율을 중심으로 집권전략을 구상하며 충돌하고 있다. 이 들에게 야당들은 그리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이미 지역구도가 야당의 집권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한나라당 후보가 되기 위한 경쟁이 대선보다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제 1 야당인 민주당의 존재감 상실은 이러한 구도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집권의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민주당의 잘못이 없이 희생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 들이 구도에 희생된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스스로 국민의 사랑을 받을 만큼의 노력을 하지 못한 점은 처절한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민주당의 잘못은 무엇인가? 3김정치가 끝나는 시점에서 한국의 정치는 중요한 업그레이드를 했어야 마땅하다. 특히 일인보스와 다수의 추종자로 구성된 정당의 구조를 혁파하고 새로운 민주적 정당의 전형을 구축하여 국민에게 다가섰어야 마땅하다.


여전히 지역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국회의원 자리나 지방자치단체장 등 선출직을 획득하고 지키는데 집착할 것이 아니라 지역구도 정치를 압도할 정도의 가치지향과 정당민주주의를 확립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수도권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세력에 대항하여 강력한 지방분권의 패러다임을 제시했어야 하지만 그런 이슈를 한나라당내 친박계에게 선점당하고 말았다.


또 여전히 정당의 의사결정 구조는 낙후되어 계파간의 나눠먹기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들이 만든 유령정당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구성된 정당이 정치인들을 끼워내는 구조를 만들었다면 국민의 상당수에게 어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성공한 전례도 있다. 2002년 국민경선으로 불리하던 대선구도를 유리하게 이끌었던 것이 그 것이다.


정당은 여전히 국민과 유리되어 정치인들끼리 나눠먹는 구조이니 국민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가 없다. 사실 여당과의 정책적 차별성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다. 오로지 정치인들의 이익 나눠먹기에만 관심을 갖고 정당의 민주화도 정책적 지향점도 상실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지역구도가 한국정치를 지배한다면 한나라당은 영원히 집권할 것이다. 그 것을 극복하려면 확실히 다른 이슈와 확실히 다른 정당의 구조를 만드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전히 유령당원들을 만들고, 정치인들이 대의원 숫자를 나눠먹으며, 그런 유령과 같은 대의원들이 의사결정을 하는 정당이 국민과 호흡하고 국민 속으로 파고들 방법은 없다.


한국정치가 한나라당내 계파간의 경쟁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야당들이 소외되고 있다면, 야당이 살 길은 진정한 민주정당의 모습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확실히 한나라당과 차별화된 서민과 대중의 삶에 천착하는 정책지향을 분명히 보이는 것이다.


한나라당과 비슷한 기득권층 비위맞추기로는 점점 존재감을 상실해갈 뿐이다. 올바른 야당이 없는 정치는 국민에게 재앙이며 나라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든다. 뭔가 달라진 바른 야당이 있어야 정치에서 일말의 희망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야당들의 환골탈태가 진정으로 필요한 때이다.


개혁이 시급한 것은 사법부가 아니라 검찰 정치

요즘 대한민국의 집권세력에게는 사법부가 눈엣가시처럼 여겨지고 있는 모양이다. PD수첩의 제작진에 대한 무죄선고를 계기로 사법부를 손보고 싶은 의도를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다. 일부 수구단체의 노인들은 대법원장과 법관들에게 테러까지 감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PD수첩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하등의 결함이 없고 완벽하게 증거와 논리를 갖춘 판결이라는 점이다. PD수첩이 허위사실을 보도해서 정부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집권세력이 검찰을 시켜 무리한 수사를 했고, 무혐의 의견을 가지고 있던 수사팀을 교체까지 하면서 기소를 했다. 당연히 그 들의 유죄를 증명할 증거는 찾을 수가 없었다.

 

PD수첩의 번역을 담당하던 정지민씨의 증언만이 검찰이 의존한 거의 유일한 증거였다. 그러나 그녀의 주장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레사 빈슨씨의 어머니가 발언한 변종 CJD는 통상 vCJD를 가리키는 것이고 이는 곧 인간광우병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결국 변호인들이 미국의 소송자료까지 제출하여 검찰의 기소가 무리한 것이었음을 밝혔고 재판부는 증거에 근거하여 무죄판결을 한 것이다.

 

판결이 나온 후 집권세력의 대응은 치졸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일부 법관들의 연구모임에 불과한 '우리 법 연구회'를 지칭하여 '하나회'를 운운하고, 마치 판사들이 이념에 물들어서 재판을 하는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 사법부의 개혁을 운운하는 꼴은 더더욱 가관이다.

 

사법부에 여전히 개혁되어야할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비판은 여전히 필요하고 유효한 일이다. 문제는 집권세력의 입맛에 맞는 판결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사법부를 개혁의 대상으로 운위하는 꼴은 볼썽사납다는 말이다.

 

또 '하나회'가 무엇인가? 12.12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던 5공 세력이 그들이다. 그들이 만든 민정당이 다른 야당과 야합해서 민자당이 되었고, 이름을 바꿔서 신한국당이 되었다. 또 그 신한국당이 이름을 바꿔 지금의 한나라당이 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들의 뿌리에 침을 뱉으며 그리 당당해서는 안 될 일이다.

 

대한민국은 삼권분립을 기반삼아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할 민주공화국이다. 박정희 정권시절 사법부가 정권의 입맛에 정확히 맞는 판결들을 주문 생산하던 추억은 이제 버려야한다. 정권에 반대한다고 잡아다가 고문하고, 죽이고, 때로는 법정에 세워 더러운 죄명을 마구 선사하고 투옥하던 일은 이제 더 이상 없어야 할 일이다.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갔던가?

 

사법부가 정권의 입맛에 맞지는 않지만 증거와 사실에 근거하여 판결하는 일은 모두가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집권세력만 자신들이 마구 권력을 남용하는데 걸림돌이라 느낄 뿐, 매우 옳고 고무적인 일이다. 오히려 그런 판결을 항상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이명박 정권은 모든 권력기관을 손아귀에 쥐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휘두르고 있다. 검찰, 국세청, 경찰, 국정원 등 지난 정권에서 독립적 지위를 확보했던 기관들이 이제 모두 집권세력의 통치수단이 되고 있다. 조선, 동아, 중앙 등 거대신문은 본래 지금의 집권세력을 편들어 왔고, 그나마 구성원들의 노력으로 독립성을 찾는 듯 했던 방송들도 이제 집권세력을 비판할 수 없는 처지로 보인다. 그런데 마지막 남은 사법부조차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길들이려 한다면 너무나 염치없는 일이다. 무슨 왕조국가를 만들고 싶은 것인지 묻고 싶다.

 

지금 시급한 개혁의 대상은 사법부가 아니라 검찰이고, 국세청이며, 경찰과 국정원이다. 국정원은 이런저런 국내정치에 개입하는 모습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일부 정권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사찰을 당하고 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경찰은 이미 국민을 공권력의 힘으로 제압하는데 익숙해지고 있다. 국세청은 전직대통령의 측근을 편법까지 동원하여 세무조사하고 결과를 집권세력에게 제공하여 정치적 보복을 도왔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그에 뒤질세라 검찰은 측근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수사하였고, 급기야 전직대통령까지 억지로 수사의 대상에 올렸다.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측근들까지 모두 잡아들여 형벌을 가하며 전직대통령의 혐의를 밝히려고 갖은 애를 썼다. 날마다 확실하지도 않은 혐의를 언론에 흘려서 여론재판을 가했고, 결국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몰아간 것이다. 지금도 검찰은 여전히 야당의 유력 정치인들을 겨냥하고 있다. 정권이 좋아하는 일만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정권에서의 검찰이 집권세력에게도 엄혹하게 단죄를 가하던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PD수첩의 제작진을 기소한 것도 결국 그렇게 정권에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검찰의 개혁이 화급한 이유가 담겨있다. 검찰이 그렇게 계속 정권에 봉사하게 된다면 그 결과 국민은 주권을 잃고 정권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검찰이야말로 하루속히 개혁되어야할 대상이며 철저히 국민적 저항에 직면해야할 대상이다.

 

정권의 구미에 맞는 검찰은 극심한 문제를 노출하고 있음에도 그저 등이나 두들겨주고, 정권의 주문에 맞지 않는 판결이 좀 나왔다고 사법부를 개혁대상으로 거론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그 어떤 반대의 목소리도 잦아든 사회는 이미 독재국가일 뿐이다.

 

누구라도 나서서 집권세력을 비판할 수 있었던 지난 정권이 그립다. 심지어 지금의 집권세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당시의 대통령을 마음껏 조롱하고 마구 근거 없이 비난하고도 처벌받은 일이 없었다. 당시 혹자는 대통령 욕하는 것이 국민스포츠가 되었다고 탄식하지 않았던가? 지금의 집권세력이 바로 차마 듣기에 민망한 욕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자신들은 그러한 자유를 누리더니 이제 집권하고 나서 그런 일은 용인하지 않겠다니 참으로 이율배반적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고단한 민초들이 집권자를 마음껏 욕할 수 있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인 것이다. 사는 것이 고달픈데 그런 비판조차 못하게 입막음을 당한다면 어쩌란 말인가? 사법부까지 자신들의 입맛에 맞고, 모두 집권자를 찬양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민주공화국을 포기하고 속히 왕정을 선포하는 것이 어떨까? 그러면 이 씨의 나라가 될까?  아마도 좀 어렵지 않을까 싶다.

 


세종시의 건설에 얽힌 정치적 함수 정치

한국의 정치권은 지금 세종시의 수정과 원안추진을 놓고 시끄럽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는 행정수도를 충청권으로 이전할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물론 충청권에서의 득표를 위한 전략적 고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권 과밀화와 국토의 불균형 발전은 반드시 해결해야할 시대적 과제이기도 했다.


당시 야당의 이회창 후보는 당연히 이런 공약에 반대했다. 자신의 고향이 충청도였지만 그의 정치적 기반은 한나라당이었다. 바로 수도권의 기득권층과 영남의 표를 결집하면 절대로 질 수 없는 선거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들의 기득권에 반하는 공약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선거는 노무현 후보의 승리로 끝나고 행정수도의 이전은 추진에 탄력을 받게 되었다. 특히 2004년 한나라당과 구 민주당의 연합에 의한 대통령 탄핵으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수의 의석을 확보한 후에는 쉽게 진행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바로 수도권의 기득권과 관련한 이해득실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과 손학규 경기지사 등이 강력히 반대했을 뿐 아니라 반대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이명박 시장 측과 가까웠고 지금은 법제처장에 기용된 이 석연 변호사가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제기하였다.


헌법재판소도 수도권에 기득권을 상당히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재판의 결과는 그 기득권을 수호하는 쪽으로 결론이 지워졌다. 성문헌법을 가진 국가에서 관습헌법을 들어 위헌이라 했고, 분명히 조선과 대한민국은 다른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초기의 경국대전을 들어 한성이 수도라는 것을 헌법사항으로 보았다. 아마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차용한 궤변이었을 것이다.


참여정부는 곧 대안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것이 바로 행정중심 복합도시의 건설이었고, 여야가 합의하여 세종시가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당시의 한나라당 대표는 박근혜 의원이었고, 이명박 대통령은 국회의원도 아닐 뿐 아니라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7년 대선에서 당시의 이명박 후보는 표가 다급한 나머지 소신과는 달리 세종시를 확실히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가 있다. 말하자면 당선되고 나서 말을 확실히 바꾼 것이다. 보통 여야가 합의에 의하여 처리한 법을 시행도 하기 전에 다시 집권자의 뜻에 따라 뜯어고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물론 정권의 수정주장에도 논리적 근거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행정의 효율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주장이 바로 그 것이다. 그러나 세계최고의 IT강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청와대와 부처 간의 물리적 거리가 그리 크게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지금 정치권이 바로 이 이슈를 가지고 정치적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복잡할 뿐이다. 그동안 한국의 선거와 정치구도를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는 지역감정이었다. 항상 지역감정만 조장하면 한나라당은 백전백승이다. 영남의 유권자가 충청과 호남을 합한 수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그러한 신화가 깨지고 말았다. 외환위기를 초래하고 국가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영남의 표를 철저히 독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997년에는 이인제의 출마로 수백만 표를 빼앗겼고, 2002년에는 영남출신인 노무현 후보에게 또 25%가 넘는 표를 빼앗겨서 거듭 패배하고 말았다. 이제 영호남 간의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것만으로는 항상 이길 수가 없음을 자각한 것이다.


이제 새로운 대결구도를 만들어야 100% 승리를 장담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수도권과 지방의 대결이 그 것이다. 수도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으로 확실히 자리매김을 한다면 그 어떤 전국단위 선거도 항상 압승이 보장된다. 수도권의 인구가 전국인구의 50%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오히려 세종시의 원안추진이 훨씬 필요해 보이는 이유이다.)


또 한 가지의 문제는 차기의 한나라당 후보경선과 관련된 문제의식이 잠재하고 있다. 지금의 집권세력은 박근혜 의원에게 대선후보 자리를 순순히 내주기가 싫을 것이다. 세종시 관련 법안은 박근혜의원이 한나라당 대표로서 당시 여당과 합의해서 처리해준 법안이라는 점에서 뭔가 그 공을 축소할 필요도 느꼈을 법하다. 수도권의 기득권을 중심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충청권의 표를 확실히 챙겨둘 것인가 하는 친이계와 친 박계의 선택이 복잡하게 얽히고 있는 것이다.


본래 처음에는 반대를 했으나 지금은 한나라당을 나와서 충청권을 기반으로 삼는 정당을 만든 이회창씨도 목소리를 제법 높이고 있다. 바로 충청권을 자신의 득표기반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겉으로는 그럴싸한 명분과 구실을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상 정치적 이득을 위한 계산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과연 옳은 것이 무엇인지 결론적으로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은 국토가 좁기로 유명한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인구밀도는 세계최고의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토를 고루 사용하지 않고 좁은 수도권에 모두 모여서 북적대고 있다. 교통이 정체되고 공해가 극심해서 도심에서는 숨쉬기가 불편할 정도이다. 지방의 인구는 줄고 수도권으로 계속 유입되고 있다. 과연 그렇게 서울을 중심으로 살아야할 이유가 있을까?


지방은 공동화가 점차 심해지고 있다. 모처럼 지방에 가면 노인들만 몇 분이 동네를 지키고 젊은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아보기 어렵다. 빈집들이 을씨년스럽게 보일 정도다. 점점 인구가 줄어서 더욱 사람이 살기 어려운 시골마을이 늘고 있다. 앞으로는 수도권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전국단위 모든 선거에서 이기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일까?


수도권은 점차 과밀화가 심해져서 경제적인 측면의 경쟁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특히 높은 주거비와 교통비 및 생활비의 문제는 세계의 어느 도시에 비해도 경쟁력이 떨어질 정도이다. 이런 상태로는 수도권도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부적합한 도시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세종시를 국토의 중심부에 건설하고 점차 지방의 균형발전을 추구하는 일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역사적 책무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시를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하는 것은 수도권의 인구과다가 극심할 뿐 아니라 수도권에 그만큼 많은 기득권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수도권에 작은 아파트 한 채를 가진 사람이 세종시의 건설로 그리 타격을 받을 것도 없지만 막연히 피해의식을 갖고 반대한다면 그들은 스스로의 부도덕성을 돌아봐야 할 일이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찌되건 단지 자신의 금전적 이득만을 극도로 챙기는 것을 어찌 도덕적이라 하겠는가? 부도덕한 국민은 항상 부도덕한 정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부도덕이 유행인가보다.


돈과 정치권력에 기생하는 언론 사회,문화,교육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에서 언론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공기이다. 정치권력에 대하여 건전한 비판을 수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여론을 형성하여 정치구도에 직접 변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건강한 언론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언론의 역할이 중요한 만큼 각 언론기관에 요구되는 도덕적 책임도 엄중할 수밖에 없다. 언론이 그릇된 역할을 수행하면 공익을 해하는 흉포한 흉기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론이 반드시 갖춰야할 덕목을 세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언론은 최소한의 공정성을 항상 유지하여야한다. 정치가 모든 사회적 이해갈등을 조정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언론은 그 과정을 공정히 다루는 심판에 해당한다. 당연히 불편부당한 태도를 유지하여야 마땅한 일이다.


둘째, 정직성이다. 사익을 추구하며 공익을 가장하는 교활함을 보여서는 안 된다. 자신들의 이익을 겨냥하여 교묘한 왜곡을 일삼는 것도 그렇거니와 그런 의도를 숨기고 자신들이 마치 공정한 심판인 양 가장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될 일이다.


셋째, 독립성이다. 돈이나 정치권력과의 유착관계는 그 사회를 송두리째 좀 먹는 일이 되고 만다. 특정한 정치세력과 유착하여 그 들이 유리하도록 하거나, 특정한 정치세력과 과도한 적대감으로 그 들이 불리하도록 만드는 것은 민주주의를 뿌리부터 흔드는 일이다. 재벌과의 유착 또한 경제정의를 해치고 다수에게 심각한 피해를 끼친다.


그 외에도 언론이 갖춰야할 덕목이 많을 테지만 이 세 가지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이 기준들을 가지고 한국의 주요언론들을 평가하는 일은 무척 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너무 쉽게 이러한 원칙들에 배치되는 행태를 보이고 있어서 정성들여 살펴보지 않고도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신문시장의 70%를 소위 말하는 '조.중.동'이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그 들의 공정성은 어떨까?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여 잘못된 영어를 사용하여 네티즌들의 비웃음을 산 일이 있다. 공화당 primary에서 패한 줄리아니 전 뉴욕주지사에게 했던 말이다. (Why don't you ask me know-how to win the primary.) 시제도 틀리고 어휘도 부적절한 표현을 했음에도 다음날 동아일보에는 'MB식 영어 소통에 문제없었다.'라고 찬양기사가 나왔다.


반대되는 예를 들어보자. 2002년 12월 19일 대선 당일의 조선일보에는 아주 섹시한 제목의 기사가 떴다. 제목은 '정몽준도 노무현을 버렸다.'는 제목으로 정몽준의 후보단일화 철회 및 지지철회가 지극히 옳은 결정인 것처럼 보도하였다. 지지철회라는 사실을 보도한 것이 아니라 명분도 이유도 따지지 않고 특정 대선후보가 당연히 버려져야 한다는 식의 보도를 한 것이다. 이런 일 외에도 공정성을 문제 삼을 기사는 매일매일 셀 수도 없이 많다.


또 위의 예에서는 정직성의 결여도 분명히 눈에 보인다. 자신들의 사적이익을 위해서 유리한 정치세력을 편들고 반대쪽을 깎아내리면서도 스스로 거룩한 심판의 모양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다. 심판의 옷을 입고 한쪽 팀의 선수로 열심히 뛰는 모습에서 정직성이라곤 찾아볼 수조차 없다. 또 그 들의 그런 행태에서 스스로 언론기관의 독립성을 버리고 정치권력과의 유착을 위해 눈물겹게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경제문제로 가서 다시 살펴보자. IMF외환위기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지만 당시의 정권이 구미에 맞았던지라 연일 정부가 주장하는 '한국경제 끄떡없다.'를 되풀이 하였다. 이어 정권이 바뀌자 위기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정부를 열심히 비판하며 건전한 언론의 역할을 운운하기도 하였다.


외환위기가 일부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극복되었지만 그 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지난 참여정부 시절에는 또 연일 경제파탄 론을 설파하기에 바빴다. 일인당 GDP가 $20,000인 대한민국의 경제성장률을 불과 몇 천불에서 허덕이는 중국, 인도, 베트남과 비교하며 성장률이 너무 낮다며 마치 정권이 무능해서 그런 것처럼 주장하였다. 물론 당시의 한국경제는 적어도 3%후반에서 5%사이에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으며, 이는 선진국은 물론 우리와 비슷한 수준의 국가들보다 높은 것이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지금까지 한국의 극심한 경제적 침체를 겪고 있다. 물론 이명박 정권의 잘못으로 초래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금융시스템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파급된 것이기는 하다. 그런데 한국의 언론들은 연일 한국이 선진국에 비하여 가장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며 이명박 정권의 공덕을 찬양하고 있다. 왜 이번에는 한국보다 훨씬 빨리 회복하고 있는 중국과 비교하지 않는 것일까?


지난 정권에서는 대통령이 자원외교를 위해 수많은 나라를 방문하고 많은 결실이 있었음에도 크게 보도한 일이 없었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다수는 모르고 지나간 일이다. 그런데 지금 정권에서는 별것도 아닌 공사수주조차 대통령의 공으로 대서특필을 한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을 50%대로 올려놓았다. 참으로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이다. 아마도 각하께서 잊지는 않으실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얻을 기대이익이 있기 때문이고, 그렇게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에 정직한 보도는 애당초 기대할 일이 못된다. 공정성, 정직성, 독립성은 한국의 주요 신문에게는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일 뿐이다.


이들 신문사에게 앞으로 돌아갈 이익은 과연 무엇일까? 무수히 많겠지만 우선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만 보더라도 대단한 것이다. 점점 종이신문 장사가 이익을 내기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이들 신문에게 방송을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한 미디어법이 바로 그 것이다. 지금 이들의 보도는 이명박 정권에게의 충성경쟁에 불과하다. 그 들에게 방송을 하나씩 모두 나눠주기에는 모자라고 결국 더 많은 충성을 보여야 탈락하지 않고 하나를 얻어 챙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보도를 보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그런 신문을 여전히 들여다보고 있다면, 그 것도 아까운 돈을 내고 본다면, 당신은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다. 혹시 지나치다 흘깃 보게 되더라도 그 들이 보도하는 것이라면 정확히 반대로 해석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공정하지도 않고, 매우 부정직하며, 독립성이라곤 처음부터 추구하지도 않았던 신문에서 세상의 흐름을 읽으려 한다면 소경에게 길을 안내하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는가? 그 것들은 독이다. 눈을 씻고 찾아도 약될 일이라곤 없다.


검찰, 국정원, 경찰, 국세청 등 권력기관만 무서운 해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욱 심각한 사회적 해악은 바로 정치구조조차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바꾸곤 해 왔던 거대신문들이다. 이 들은 국민이 원하는 정부를 구성하는 일조차 방해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진정으로 무서운 민주주의의 적은 바로 잘못된 언론이다. 정권과 혼연일체가 되어 주거니 받거니 이익을 챙겨 나가는 이들이 마치 독버섯처럼 사회전반을 오염시켜 나가고 있다. 오히려 국민의 의식 속에 조금씩 독버섯의 포자를 퍼뜨리고 있는 중이다. 생각하면 소름이 돋고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그들이 원하는 사회는 무엇일까? 생각해볼 일이다.


대한민국은 검찰공화국인가? 정치

본래 검찰의 의무는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불법행위를 저지른 자를 법의 이름으로 추상같이 단죄하되, 선량한 시민을 법의 이름으로 보호하는 것이 바로 사회정의일 것이다. 다만 자신들의 업무처리에 있어서도 법률적 절차를 지켜야하고 법에 복종해야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검찰을 그리 달가운 시선으로 바로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들을 마치 저승사자처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모두 자신의 행위에 문제가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선량한 사람이라도 그들의 표적이 되기만 하면 처참한 곤혹을 피할 수 없다.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검찰은 두려운 존재일 뿐 달가울 리가 없다.


그 동안 검찰의 수사로 인하여 희생된 목숨이 수 없이 많았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검찰의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현대그룹의 정몽헌 회장이 검찰의 수사도중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심지어 노무현 전 대통령도 결과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야했다.


그렇게 유명한 분들도 검찰의 손에서 목숨이 유린되는 일이 일어나는데 힘없는 서민들은 오죽하겠는가? 혐의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자신들의 수사대상을 처벌받도록 만들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고, 그렇게 기소와 승소에 집착하는 조직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존재의미인 사회정의는 의미가 박약한 것이다.


문제는 목적의 달성을 위해 불법행위를 서슴지 않고 저지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런 사례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리 드물지 않다. 과거 어떤 중소기업에 근무하던 시절 직접 목도한 사건이다. 기계의 수입과정에서 법해석의 차이에 따라 미묘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검찰이 수사를 개시하면서 수 십 억대 밀수사건으로 언론에 보도가 되었다. 혹시라도 피의자 측의 반격이 있을까 싶어서 미리 검사가 언론플레이를 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공소유지가 어려워지자 검사가 스스로 피의자와 모종의 거래를 시도한다. 유죄를 이끌어 내는 대신 집행유예로 조기에 재판을 종결하고 풀어주겠다는 것이다. 물론 재판부와 변호사까지 협의가 된 일이었다. 끝까지 싸우면 무죄를 자신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심한 고초를 더 이상 겪기 싫은 피의자는 결국 포기하고 제안을 받아들여 유죄를 인정하고 말았다. 신속히 옥고를 마치고 싶었기 때문에 결국 검찰의 입맛대로 요리된 것이다. 이런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썩어빠진 언론과 검찰이 유착을 형성하여 누군가를 노린다면 그 대상은 여지없이 엄청난 피해를 입거나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렇게 수많은 기업인과 유명 정치인 그리고 훨씬 더 많은 민초들을 검찰은 희생시켜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부끄러운 줄을 전혀 모르고 자신들의 조직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산다.


언론에 더하여 정치권력까지 합세하면 정말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는다. 군사정권 시절 인혁당 사건처럼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주문생산 기소까지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군들 이들의 손아귀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결국 죽음으로 내몬 과정에서 과연 검찰이 스스로의 결정에 의하여 그렇게 집요한 노력을 했을까 의문이다. 상대의 도덕성에 상처를 입혀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정치권력의 시도라고 의심할 개연성이 충분하다. 매일 확실치 않은 피의사실을 브리핑하여 언론에 보도되도록 해서 누가 이익을 얻을지를 생각해볼 일이다.


지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그룹 중에서 나름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한명숙 전 총리가 검찰의 새로운 표적이다. 이번에도 역시 몇몇 언론과의 피의사실 흘리기 게임이 펼쳐지고 있다. 또 하나의 노무현을 만들고 그들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서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속셈이 아닌지 의심이 간다.


검찰이 마치 살인마처럼 인명을 노리는 무시무시한 존재로 각인되는 것은 온 국민의 불행이다. 검찰은 이 땅의 양심을 지키는 든든한 파수꾼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검찰이 철저히 달라져야한다.


첫째, 피의사실을 공포하는 행위자를 색출하여 재판정에 세워야한다. 노 전 대통령의 수사상황을 하루하루 브리핑하여 온 국민에게 홍보한 홍모 검사, 지금 또 언론에 혐의를 흘리며 교묘히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하려는 그 누군가를 재판정에 세워서 준엄한 심판을 내려야 할 것이다. 불법을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검찰의 단죄라면 누구도 달게 받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정치권력과의 유착을 끊고 독립적 기관으로 서야한다. 스스로의 기득권을 버리고 검찰을 독립시킨 전 대통령마저 자신이 독립시킨 검찰의 손에 희생된 마당에 기대할 바는 못 되지만, 그래도 검찰의 권력은 너무도 막강하여 정치권력과 유착을 반드시 끊어야 옳다. 지금 검사들의 정치권 진출통로로 역할을 하는 정당이 어느 당인지 살펴보면 문제가 한눈에 보일 것이다. 바로 그 문제를 국민이 나서서 응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기소권의 독점에 대한 적절한 견제장치가 있어야 한다. 고위공작자를 수사할 수 있는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서 검사들도 수사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매우 유효하게 작동될 수 있는 장치가 아닐 수 없다. 그 들이 스스로 불법행위를 저지르지 않게 하려면 처벌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둬야 하는 것이다.


넷째, 검찰조직의 일체감을 깨야한다. 모두가 제 식구 감싸기를 하며 서로서로 보호해주는 일이 있어서는 정의를 말할 자격조차 없다. 그들은 이미 패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누구의 어떤 잘못도 자신들의 조직원이라면 단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은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들에게 국민은 피해를 입고 있다. 조직 폭력배와도 매우 흡사한 일체감은 하루속히 버려야 한다.


이제 더 이상은 검찰의 불법행위로 인하여 희생되는 정치인이 없어야 한다. 또 국민들도 검찰이 죄지은 일없이 무서운 존재로 인식하지 않도록 변화가 필요하다. 정치적 의도에 의하여 검찰이 사용되는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검찰도 법 앞에 평등한 존재로 스스로 겸손히 자리매김하는 날이 오려면 국민의 깨어있는 의식과 판단력이 절실한 일이다. 국민은 민주공화국의 주인이자 최후의 심판을 내리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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